노라와 트루먼.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만들어져 있는 세상을 의심없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짜의 삶을 깨닫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트루먼은 세상의 끝을 향해 노를 저었다. 하지만 그 끝은 철저히 통제된 새장과 같았다. 트루먼은 비상구의 문을 열고 나간다. 노라는 아버지와 남편의 인형으로 사는 삶을 스스로 거부하고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간다.
<트루먼 쇼>의 트루먼과 <인형의 집>의 노라의 이야기다. 모두 자신의 삶을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둘을 평가를 달리한다.
트루먼의 탈출은 대부분 환호하고 통쾌감마저 느끼는데 반해 노라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간 것에는 논쟁의 여지가 된다는 것이다.
<트루먼 쇼>를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트루먼을 개별적인 독립된 한 인간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인형의 집>의 노라를 볼 때는 인간이지만 여성, 엄마, 아내라는 관념을 걷어내고 있지 못한다. 즉 트루먼은 그의 선택에 응원을 보내며 깔끔하게 마무리되는데 노라에게는 책임을 묻는다. 남겨진 자식들과 남편의 삶은 어떡하냐고 말이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문 밖으로 나간 후'도 다르다.
트루먼은 극명하게 모든 것이 '가짜', 조작된 삶이라고 깨닫게 된 순간 자신을 과거와 좀 더 쉽게 분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라는 문 밖으로 나가도 짜여진 세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트루먼의 세트장과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아주 작은 새장에서 나왔을 뿐.
채만식의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 조선일보 연재)나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 일어난 일 또는 사회의 지주>에서처럼 노라의 삶은 해피엔딩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루카스 네이스의 <인형의 집 Part 2>에서는 좀 다르다. 노라가 성공 후이혼문제로 15년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Caspar David Friedrich, <Monk by the Sea c.1809> Courtesy bpk Berlin
트루먼은 이름처럼, 마지막 PD의 말처럼 모든 것이 잘 짜여진 가짜지만 그 자신만은 진짜다.
노라에게는 인간으로서 진정 자신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도전이었다.
보통은 깨닫게 되어도 현실에 좌절하거나 타협하지만 노라는 용기를 낸다. 그런 노라를 한 인간으로서 지지한다. 남겨진 가족, 특히 아이들의 삶은 헬메르가 유일하게 노라의 헌신과 양심에 호소할 수 있는 부분일 것 같다. 이혼 가정의 아이들의 상처는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지에 대한 여자의 선택은 불가피하다. 노라가 자식들의 인형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헬메르의 변화와 도움이 절실하다. 사실 그 전쟁은 새장 안이냐 새장 밖이냐의 차이다.
인간으로서 독립은 물리적, 정신적 위험을 감내하고 두려움을 극복할 각오가 됐을 때인것 같다.
또 막연한 죄책감과 학습된 사고, 관념들을 깨닫고 넘어섰을 때 독립할 준비가 된다.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되었다고 생각한 때는 부모, 가족, 사회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과 나는 결국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을 때이다.
<인형의 집>의 헬메르(노라의 남편)과 <트루먼 쇼>의 TV 프로듀서가 서로 닯았다.
노라와 트루먼을 소유와 통제의 대상이며 보호해야 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로 대한다는 점에서.
또 '잘 짜여진 시스템안에서 순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모른다며 끝까지 가르치려 한다는 점에서. 나아가 자신의 생각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르고 자신의 권위와 그 만족을 포기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잘 짜여진 시스템을 알면서도 용기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잘 짜여진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인형의 집> 표지: Edvard Munch의 Dance of Life
_ 아버지는 나를 자기 아기 인형이라 부르셨죠.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나는 당신이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
(...)
나는 나 자신과 바깥일을 모두 깨우치기 위해 온전히 독립해야 해요. _
_ 바깥 세상에는 진실이 없지만 내가 만든 그곳은 다르지. 이세상은 거진말과 속임수뿐이지만 내가 만든 세상에선 두려워할 게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