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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play Oct 14. 2020

모든 것이 잘 짜여진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거짓을 알게 되었을 때 용기 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잘 짜여진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노라와 트루먼



노라와 트루먼.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만들어져 있는 세상을 의심없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짜의 삶을 깨닫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트루먼은 세상의 끝을 향해 노를 저었다.  하지만 그 끝은 철저히 통제된 새장과 같았다. 트루먼은 비상구의 문을 열고 나간다. 노라는 아버지와 남편의 인형으로 사는 삶을 스스로 거부하고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간다.


<트루먼 쇼>의 트루먼과 <인형의 집>의 노라의 이야기다. 모두 자신의 삶을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둘을 평가를 달리한다.

트루먼의 탈출은 대부분 환호하고 통쾌감마저 느끼는데 반해 노라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간 것에는 논쟁의 여지가 된다는 것이다.


<트루먼 쇼>를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트루먼을 개별적인 독립된 한 인간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인형의 집>의 노라를 볼 때는 인간이지만 여성, 엄마, 아내라는 관념을 걷어내고 있지 못한다. 즉 트루먼은 그의 선택에 응원을 보내며 깔끔하게 마무리되는데 노라에게는 책임을 묻는다. 남겨진 자식들과 남편의 삶은 어떡하냐고 말이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문 밖으로 나간 후'도 다르다.

트루먼은 극명하게 모든 것이 '가짜', 조작된 삶이라고 깨닫게 된 순간 자신을 과거와 좀 더 쉽게 분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라는 문 밖으로 나가도 짜여진 세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트루먼의 세트장과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아주 작은 새장에서 나왔을 뿐.


채만식의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 조선일보 연재)나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 일어난 일 또는 사회의 지주>에서처럼 노라의 삶은 해피엔딩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루카스 네이스의 <인형의 Part 2>에서는 다르다. 노라가 성공 후 이혼문제로 15년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Caspar David Friedrich, <Monk by the Sea c.1809> Courtesy bpk Berlin   



트루먼은 이름처럼, 마지막 PD의 말처럼 모든 것이 잘 짜여진 가짜지만 그 자신만은 진짜다.


노라에게는 인간으로서 진정 자신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도전이었다.

보통은 깨닫게 되어도 현실에 좌절하거나 타협하지만 노라는 용기를 낸다. 그런 노라를 한 인간으로서 지지한다. 남겨진 가족, 특히 아이들의 삶은 헬메르가 유일하게 노라의 헌신과 양심에 호소할 수 있는 부분일 것 같다. 이혼 가정의 아이들의 상처는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지에 대한 여자의 선택은 불가피하다. 노라가 자식들의 인형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헬메르의 변화와 도움이 절실하다. 사실 그 전쟁은 새장 안이냐 새장 밖이냐의 차이다.


인간으로서 독립은 물리적, 정신적 위험을 감내하고 두려움을 극복할 각오가 됐을 때인것 같다.

또 막연한 죄책감과 학습된 사고, 관념들을 깨닫고 넘어섰을 때 독립할 준비가 된다.

내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되었다고 생각한 때는 부모, 가족, 사회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과 나는 결국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을 때이다.


<인형의 집>의 헬메르(노라의 남편)과 <트루먼 쇼>의 TV 프로듀서가 서로 닯았다.

노라와 트루먼을 소유와 통제의 대상이며 보호해야 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로 대한다는 점에서.

'잘 짜여진 시스템안에서 순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며 끝까지 가르치려 한다는 점에서. 나아가 자신의 생각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르고 자신의 권위와 그 만족을 포기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잘 짜여진 시스템을 알면서도 용기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잘 짜여진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인형의 집> 표지: Edvard Munch의 Dance of Life

_ 아버지는 나를 자기 아기 인형이라 부르셨죠.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나는 당신이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

(...)

나는 나 자신과 바깥일을 모두 깨우치기 위해 온전히 독립해야 해요. _






_ 바깥 세상에는 진실이 없지만 내가 만든 그곳은 다르지. 이세상은 거진말과 속임수뿐이지만 내가 만든 세상에선 두려워할 게 없어. ...

두렵지? 그래서 떠날 수 없지

자넨 여기 속해 있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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