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지 않는 자는 아프지 않네 (feat. 전생 슬라임)
https://www.youtube.com/watch?v=oRVaiig0lWw&t=183s
[커버 스킨 이미지 출처] '구이저우 메트로 칸타타' 동영상 캡쳐
설 명절 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긴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금방 지나가 버렸네요.
연휴를 통해 충전과 힐링의 시간 보내셨길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1월 25일자 방송 <특파원보도 세계는 지금> 중 '중국의 청년실업 현황'편을 시청하면서 떠오른 몇몇 노래와 단상을 적어보고,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할까 합니다.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이런 요상한 제목의 일본 애니를 아시나요?
“이세계물(異世界物)”이란 판타지 장르가 대대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데, 넷플릭스에서만 검색해 봐도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으실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먼치킨 또는 타입슬립, 환생 계열의 <메모라이즈>, <환생좌>, <재벌집 막내아들>, <어게인 마이 라이프>, <철인왕후>, <선재 업고 튀어>와 같은 작품들이 '이세계물'에 포함된다 볼 수 있겠군요.
참고로 이세계물에서 <전생(轉生)>은 윤회(輪廻) 또는 환생(還生) 교리에 기초한 '현생(現生) 이전의 삶', 즉 “전생(前生)”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이세계물은 대체로 인생을 ‘게임’ 또는 ‘매트릭스 속 가상현실’로 보는 시각을 갖거나, '평행우주', '다중우주'와 같은 멀티버스 세계관을 베이스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이유로 “전생(轉生)”은 윤회의 교리와 무관하게 '시스템의 오류' 또는 '시스템의 숨겨진 계획' 등등의 어떤 계기로 주인공에게 일어난 특별한 경험을 전제로 하게 됩니다. 한편 이세계물에서 전생(轉生)은 다른 시간 또는 차원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설정도 있지만, 최근의 트렌드는 ‘고블린’, ‘몬스터’로 전생하는가 하면, 나아가 ‘슬라임’이나 ‘칼’과 같은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로 전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환생(還生)이라 부르든 전생(轉生)이라 부르든, 이와 같은 이세계물 판타지 장르에서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간직한채 다른 삶으로 리셋한다”는 내용이 핵심 설정이 되는데, 이로써 종전의 삶에서는 NPC(Non Player Character)나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던 주인공이 리셋 후 각성하여 ‘메인 PC(Main Player Character)’ 또는 ‘히어로’로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그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세계(異世界)로의 전생(轉生)은 판타지일 뿐이죠.
몹(Mob)들에게 전생의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구요.
이처럼 전생은 '현실에서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대리만족이라도 얻으려고 그렇게 인기인가 봅니다.
기업은 채용시장에서 고급 경력직을 구하거나 신입 대신 AI로 인력을 대체하려 하니, 청년실업률이 예사롭지 않은데다가, 앞으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으로 예상되죠.
청년실업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 또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중국은 청년실업률이 20%를 넘게 되자 '1주일 1시간 아르바이트 근무자'도 취업자로 분류하도록 통계방식까지 바꾸었고, 그럼에도 15%가 넘는 수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졸업하는 순간 실업자"라는 말에 졸업을 미루고 대학원 진학으로 취업을 미루는가 하면, 대학원 졸업 이후에도 취업이 쉽지 않으니 석박사급 고학력자들이 식당종업원이나 배달라이더로 뛰는 일도 드물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청년실업을 논하자니 2015년 한국 사회에 널리 회자되기 시작했던 '수저계급론'을 빼놓을 수 없겠네요.
당시 시대적 배경을 되짚어 보자면,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신자유주의가 쇠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긴 했으나, 오히려려 신자유주의의 약육강식 논리는 오히려 강화되었죠.
그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뒤를 이어 애플,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과 같은 소수의 플랫폼 또는 빅테크 기업 중심으로 산업이 재펀되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생존경쟁이 날로 심각해진 상황에서, 한국에선 '수저계급론'이 등장하는가 하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헬조선' 등의 신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반면 그 즈음부터 '이생흥(이번 생은 흥했다)'을 선전하며 무한경쟁을 상업화하는 학원가와 그에 동조하는 부모들의 희망사항이 맞아 떨어져, 초등학교때부터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트랜드가 생겨나기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육이 계급 대물림의 통로가 되거나 그 정당화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죠.
물론 사회양극화는 2010년대 보다 2025년 현재가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 평가되며, 국민의 약 90%가 '수저계급론'을 두고 객관적인 사회현상이라 보고 있습니다.
각종 고시와 취업 전선에서 방황하는 청년들은 '불평등 사회'에 좌절하며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는데, 엘리트 집안의 금수저 교수님께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훈화 말씀해 주시니 청년들의 마음은 더 아려옵니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고 노래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2평 남짓 고시원에 살면서 바퀴벌레를 잡아본 적 없고, <평등 사회>를 외치는 정치인들의 고상한 이념은 혀 끝에서만 맴돕니다.
물론 수저계급론은 '레벌 업'의 희망이라도 걸어볼 수 있는 말이긴 합니다.
그런데... 상위 계급으로의 도약을 꿈꾸며 ‘인생 한 방’ 코인판에 뛰어들어 잠시나마 나름대로 큰 돈을 벌고 사치도 부려봤는데, ‘마지막 한 번’이라는 희망에 배팅했다가 그동안 모아둔 전재산을 탕진하게 됩니다.
[저희 회사는 귀하와 같은 인재를 원합니다]라는 채용확정 문자받고 '앞으로 부모님께 효도하며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아보겠다' 꿈꾸는가 싶었는데, 멀리 해외 보이스피싱 소굴에 감금되는 일까지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게 현실이지요.
확률적으로 볼 때, 이번 생은 "어떤 수저를 물고 났느냐"가 좌우한다 볼 수 있으니 현생 레벨 업이 쉽지 않습니다. 현질 능력도 없어 충분한 아이템을 보유하지 못한 플레이어는 마물(魔物)의 먹이감이 되거나, 어찌어찌 마물을 퇴치하더라도 '던전 보스'를 물리치고 '스테이지 클리어'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죠.
이렇듯 많은 청년들은 이래저래 노력해도 앞 날이 뻔하니, '이번 생은 망했다'며 자조섞인 말로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겁니다. 때론 그 스스로 믿지도 않고, 있지도 않다고 여기는 환생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이런 이유로 '이생망'은 좌절의 극단을 보여주는 신조어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앞서 본 것처럼 한국의 청년일자리 문제도 심각하지만, 보다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반도체, 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국굴기>를 진행하고 있으나, 대체로 당간부를 비롯한 금수저 이상의 유학파들이 사회 곳곳에서 요직을 차지하며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면엔 소모품 취급되는 젊은 청년들의 희생이 자리잡고 있겠죠.
중국 구이저우(귀주, 貴州) 성은 중국에서 데이터, 디지털 산업이 발달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지방부채와 부동산 문제로 위태로운 곳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얼마 전 구이저우의 한 지하철 역에서 젊은이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흥겹게 떼창하는 영상이 SNS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일명 <구이저우 메트로 칸타타>라는 영상인데요. 영상 속 젊은이들의 얼굴은 즐거워 보이지만,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마냥 행복하고 활기찬 분위기의 곡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사를 알고 영상을 보면 웃음 속 아픔이 있어 보이기도 하는데 '슬픔의 승화'라 부를 수도 있겠네요.
영상 속 노래는 중국의 인디밴드 New Pants(新褲子, 신고자)의 <没有理想的人不伤心>란 제목의 곡인데, 마지막 3글자는 "不傷心(불상심)"의 중국 간체이므로, '상심하지 않는다', '마음 아프지 않다'는 정도로 해석될 것입니다. 즉 '이상이 없는 자, 꿈이 없는 자는 상심하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꿈을 꾸지 않는다면, 그리고 희망조차 버린다면 마음 아플 일도 없다고 직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New Pants의 해설로는 반어법적 표현으로 '세상에 꿈이 없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이 꿈을 향해 노력하는 모습을 응원하기 위함'이라 밝혔다고 합니다.
밴드는 노래하는 걸 꿈으로 삼는 이들이었죠. 그런데 어느새 단골 레코드 가게도, 서점도 문을 닫고, 세상은 문화의 폐허로 변해간다고 느낍니다. 이에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던 걸로 보입니다.
첫머리에서 자신들이 꿈꿔왔던 삶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너와 나의 이상 또한 물질숭배의 풍조 속에 변질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 가혹한 탓에, 더 이상 돼지우리 같은 곳에 살기 싫고, 실패한 인생으로 고독사하기도 싫습니다.
그래서 꿈을 포기하고 물질과 분주한 일상을 좇아 살아야 할지 고민합니다. 그렇게 살면 슬프지 않을거라 생각하면서요. 결국 황폐한 도시에서 돈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면 슬프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꿈을 가진 청춘'이든 '꿈을 놓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청춘'이든 매 마친가지로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노래는 '이 생에 해결책이 없다'고 말하는데도, "아픔을 공감하고 나눈다"는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위안을 주며 많은 젊은이들의 사랑받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다소 풍부한 의역을 첨가하여 해석했습니다. 가사에서 '너'는 '또다른 나'일 수도 있을 겁니다).
나의 최애 레코드점, 어제는 그녀의 마지막 날이었어
한때 날 취하게 만든 음악의 파편들은 모두다 길가에 흩날리네
나의 최애 서점, 그녀도 이 여름을 버티지 못하고
추억은 흘러 그리움되지만, 더 이상 그리워 할 것 없어
너의 꿈들은 이미 희미해져 보이지 않고
그 이상을 위해 싸웠던 날들도 결국 돈을 위한 것이었을 뿐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은 시종 죽지 않고 내 앞에 남아,
청춘을 피워보지도 못한채 늙어가네
이 생에 해결책이 없어
내가 있을 공간도 없어, 내가 있을 공간도 없어
네가 뜨겁게 사랑했던 그 사람, 이 생에 다시 만날 일 없을거야
너는 문화의 폐허 위에 서 있지만, 아무도 널 야만스럽다 여기진 않아
그 존경받는 신전들은 오직 무지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만 영험할 뿐
갈 곳 없는 난 나만의 돼지우리에 살아가고
이 밤은 잠이 오지 않는데
실패한 인생으로 고독하게 죽기 싫어
더 이상 지하 돼지우리에 살고 싶지 않아
물질의 속임수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개미들...
문화(이상, 꿈)가 없이 사는 사람은 슬프지 않겠지.
그는 아프지 않겠지
그는 슬퍼하지 않을거야
...
언젠간 그도 아플거야
그도 슬퍼하겠지
마음 아플거야
1991년 발매된 <조용필 13집 The Dreams>은 꿈을 주제로 한 앨범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타이틀곡 "꿈"은 도시로 상경한 젊은이의 꿈과 방황, 그리고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죠.
아래 영상은 가왕이란 칭호를 받는 이가 공연 도중 울컥이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담긴 인상적인 것이어서, 여러 영상 중 이걸로 골라봤습니다. 저도 2절 도입부에서 울컥하긴 했는데요, 시간되실 땐 댓글도 함께 읽어보시면 좋겠네요.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가수는, 청춘들이 '삶의 터전을 바꾸는 선택'만으로 전생(轉生)이 쉽게 이루어지진 않을 것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꿈꾸는 젊은 영혼들이 존재의 원천인 '고향'의 향기에 위로받으며 괴로움과 슬픔을 이겨내길 희망했을 겁니다.
물론, 양 어깨를 짖누르는 삶의 무게는 비단 청춘들만의 몫은 아니며, 이 땅의 중장년들도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죠.
요즘 청년들을 비롯한 상당수 국민들은 숨이 턱턱 막히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걸로 압니다.
절망의 늪을 지나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의 말, 용기내란 말도 건네기 조심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절망의 팬듈럼은 또다른 절망을 먹이삼아 그 진폭을 키워가는 법.
작은 빛 한 줄기가 어둠을 몰아낼 수도 있는 법.
중요한 건, 꺽이지 않는 마음, 날 사랑하는 마음.
(2025. 02.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