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일 칼럼 기고분)
신문방송, 인터넷 블로그, 카페, 자유토론방 더 나아가 ‘손 안의 컴퓨터’ 스마트폰을 통한 SNS나 팟캐스트 등 다양한 신종매체들이 등장하고, 이에 따라 개인이나 단체가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장이 더욱 넓어지면서 ‘표현의 자유’ 논쟁은 우리의 정치․사회․일상 영역에 깊숙이 개입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사상은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표현의 자유를 논할 때 ‘사상의 자유시장(marketplace of ideas)’이란 말이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20세기 초 미국 홈즈 대법관의 표현을 따온 말인데, ‘일정한 사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을 때, 공공선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는 공익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한, 사상이나 표현에 대한 간섭을 최대한 줄이고 자유시장을 통해 다양한 의견들이 걸러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논리적 기초는 ‘사상의 자유시장’이고, 그에 따른 국가의 개입은 ‘명백․현존하는 위험’이 인정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표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포함한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는데(헌법 제37조 2항), 특히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타인의 명예나 프라이버시권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할 수는 없습니다(헌법 제21조 4항). 이에 입법자들은 형법에서 명예훼손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 모욕죄, 공연음란죄, 음란물반포죄 등을 규정하고 있고, 공직선거법,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 청소년보호법,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표시ㆍ광고의공정화에관한법률 등으로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가 타인의 권리를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표현으로서 풍속과 관련된 것이라거나, 특히 표현의 대상이 정치나 공적 인물에 대한 것으로 공익적 목적을 가진 것일 때에는 ‘규제의 경계설정’을 어느 때 얼마만큼 해야 할지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규제가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비례의 원칙에 따라 목적이 적법하고, 규제방법이나 정도가 적절하며, 절차 또한 적법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규제의 방법이 형벌이라는 가장 강력한 수단을 사용할 때에는 명확성의 원칙, 유추해석 금지 원칙, 소급효 금지 원칙 등을 포괄하는 ‘죄형법정주의’의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헌법은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규제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럼 과연 언제 ‘규제의 필요성’이 인정되고 정당화되는 것일까요. 미국은 이민국가로 사회갈등이 많았던 나라여서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에 의거한 논리가 나름대로 체계화되어 있는 편으로, 미국에서는 널리 사회 공동체나 공익에 ‘해악이 발생할 위험’이 있을 때 그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험’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요? 헌법이나 법률이 일반적, 추상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 까닭에 말에 꼬리를 물다 보면 끝도 없습니다. 각설하고, ‘해악이 발생할 위험’에 대해 미국 판례법의 기본 입장은 당해 표현이 가지는 해악의 정도 및 근접도, 상황, 대상 영역을 고려하여 단계(degree) 별로 엄격 심사, 중간심사, 단순한 합리성 심사를 하자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 대상 영역을 기준으로 하면, 상업적 표현이나 음란물에 대한 심사는 중간심사 이하의 비교적 완화된 심사를 합니다. 표현의 내용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장소, 방식 등을 제한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한 국가의 규제가 수범자의 존재가치를 뒤흔들만한 양심이나 사상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 그러나 국가안보에 관한 사항이나 위법하게 표출된 정치적 언행을 대상으로 한 것일 때에는 시대나 정치상황에 따라 갑론을박합니다. ① 위험한 경향이 있으면 규제가 가능하다는 입장도 있었고, ② 해악이 중하다면 절박하거나 구체적인 위험이 아니어도 된다는 입장도 있었으나, ③ 현재는 앞서 본 홈즈 대법관의 견해와 같이 ‘표현에 의해 해악을 끼칠 위험이 명백하고 현존해야 한다’는 입장이 중론입니다. 즉, 불법적인 권유나 표현이 선동의 수준에 이르렀는데 미처 충분한 토론을 거치기도 전에 해악의 발생이 거의 확실시될 수준의 급박성이 인정된다면 그에 대한 규제는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코멘트] 대법원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의 이적단체 여부에 대하여 다수의견은 ‘실질적 해악의 명백한 위험’기준, 일부 반대의견은 ‘명백·현존하는 위험’기준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대법원 2008. 4. 17. 선고 2003도758 전원합의체 판결, 대법원 2010. 7. 23. 선고 2010도1189 전원합의체 판결).
하자있는 행정행위에 관한 ‘중대명백설’, ‘명백성보충요건설’, ‘구체적가치형량설’, ‘신중대성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대목으로, 형범에서의 미수범론, 위험범론과도 관련지어 상이점을 찾아보면 법학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사상의 자유시장은 페어플레이를 전제로 합니다.
시장에 내놓아 자신의 표현이나 사상이 자연스럽게 걸러지도록 하지 않고 은밀하게 치고 들어와 판을 엎어 버리려 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사상에 자신이 없는 비겁자입니다.
‘사상의 자유시장’은 가설일 뿐 현실은 아니므로, 명목상 사상의 자유시장에 맡겨진다고 하여 전부 진리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시장은 힘의 논리에 따라 조작될 수 있습니다. 정보의 과잉은 잘못된 정보를 재생산하기도 합니다.
진정 ‘사상의 자유시장을 통한 진리 실현’을 갈구한다면 개개인 스스로가 인터넷이나 언론 등 개방된 공간을 불법과 음모가 난무하는 세상이 아니라 공정한 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자기가 주장하는 사상만이 진리는 아닙니다.
진실이라도 해악의 위험성이 낮음에도 강폭한 방법을 동원하는 경우에는 거짓과 다름없습니다.
[코멘트]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또한 규제의 경계설정에 관한 문제들입니다.
① 공직선거법 제250조 허위사실 공표죄와 관련하여서는 대상 정치인의 이름을 딴 정봉주법(공익목적 중시), 나경원법(처벌 강화)이 논의되는가 하면, ② 표현의 자유를 더욱 존중하여 헌법재판소는 공직선거법 제93조 제1항이 인터넷, 블로그, 대화방 등을 이용한 사전선거운동까지 금지한다고 봐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였고(헌법재판소 2011. 12. 29. 자 2007헌마1001 결정), 이러한 취지에 따라 트위터에 일부 정치인들에 대한 낙선운동 글을 올렸던 사람이 제254조 2항(인터넷 선거운동기간 위반죄)로 기소된 사안에서 법원은 최근 무죄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12. 3. 16. 선고 2011노2977 판결). ③ 또한 판사 등 일부 현직 법조인이 자신의 개인적 의견이나 다소 부적절한 표현을 SNS에 올린 것이 문제 되기도 했는데 이는 공적인 인물 자신의 표현의 자유가 문제 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④ 근자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네르바, PD수첩 사건 등 표현과 공익의 문제에 대한 굵직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소위 미네르바법이라고 하는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제1항은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를 처벌하고 있었는데, 헌법재판소는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한 바 있습니다(헌법재판소 2010. 12. 28. 자 2008헌바157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