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5월 15일 칼럼 기고분)
사람이 혼자서 무인도에 산다고 하면 법이란 것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기에 각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요구사항이 다르다 보니 의견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한 과정에서 의견의 합치를 도출하는 절차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원시 석기시대 북한산 인근에 모여 살던 부족민들 중 힘이 센 A는 근방의 멧돼지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나머지 부족민들이 사냥할 멧돼지 수가 감소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부족의 족장과 원로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하고 ‘A가 한 달에 잡을 수 있는 멧돼지 수를 제한하고, 그 이상 사냥한 것이 발각될 경우에는 마을에서 추방하겠다.’는 결정을 합니다. 그러나 A는 부족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제가 힘이 남아서 소진하기 위해 멧돼지를 잡았던 것입니다. 족장과 원로님들의 결정도 일응 타당하지만 제가 멧돼지를 잡는 수를 원천적으로 제한하지 마시고, 제한된 수를 초과해 잡을 경우에는 그 멧돼지들을 마을을 위해 모두 기증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부족회의에서 A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 후로 부족은 일주일에 한 번씩 멧돼지 바비큐 파티를 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청동기, 철기시대가 됐습니다. 인간은 쇠를 이용하여 무기란 것을 개발하게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생겨난 재배자 계층은 국가라는 단체를 만듭니다. 국가가 구성되면서 많은 부족사회가 국가라는 더 큰 단체에 편입되고, 족장들은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받게 됩니다. 왕의 절대적인 통치가 이어지기도 했고, 왕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 사실상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란 나라에서는 의견의 합치를 ‘만장일치’를 기본으로 하기도 했고, 어느 나라는 왕의 1표가 귀족의 100표보다 힘을 발휘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와 같이 의사결정기준이 ‘총 회원 과반수 출석, 출석회원 과반수 찬성’등으로 체계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흘러 유럽 대륙에서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이 ‘회사’라는 단체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들의 힘이 강해지자 정치적 중심세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주식회사는 ‘주주총회’, ‘이사회’란 의사결정기관을 두고 있고, 집행기관으로 ‘대표이사’를, 감사기관으로 ‘감사’를 둡니다. 상인들이 중심이 된 시민계층이 정치에도 참여하다 보니 정치적인 기관도 주식회사의 형태를 닮아갑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정치기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대한민국에서 ‘국회’는 사실상 주주총회 또는 이사회의 역할을 하고, ‘대통령’은 대표이사의 역할을, ‘감사원’은 감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1860년경 ‘헨리 로버트’라는 미국 공병장교는 고대, 중세, 근대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회의법’의 원칙과 내용을 집대성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오늘날까지 국제회의, 국회 본회의 등 공적 회의는 물론 회사 이사회, 주주총회, 그리고 각종 봉사클럽, 동문회, 마을회, 입주자 대표회의 등 사적인 모임에까지 거론되는 대부분의 회의 원칙과 용어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로버트는 회의법의 기본원칙으로서 ① ‘언론의 자유’에서 출발한 ‘토론의 자유’, ‘회의 공개의 원칙’, ② ‘평등권’에서 출발한 ‘회원 평등의 원칙’들을 거론하였고, 그즈음 ‘개의정족수, 의사정족수, 의결정족수’, ‘회기, 개회, 산회, 휴회, 정회, 폐회’등의 용어를 정리하였던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도 많은 단체나 모임에 가입돼 있을 것입니다.
혈연이나 지연을 통해 만들어진 단체도 있을 것이고, 생활상의 필요에 의해 가입한 단체도 있을 것입니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각종 분과위원회나 소모임 격이라 해도 무방하겠죠.
거기서 단체의 ‘헌법’ 역할을 하는 ‘정관’을 만들고, 임원진을 뽑고 집행부를 구성하며, 기본적인 의결은 ‘총 회원 과반수 참석, 참석회원 과반수 찬성’을, 중대한 의사결정은 ‘총 회원 과반수 참석, 참석회원 2/3 이상 찬성’을 원칙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사결정방식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은 ‘다수결의 원칙’을 기본으로 의사결정의 신속성과 효율성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자께서는 각종 모임에 나가 모임의 중요 현안을 결정하시면서 위와 같은 절차들이 있어 까다롭게 느껴지실 때가 많으신가요? 그렇다고 해서 ‘형식이 뭐 중요해. 다들 어떻게 하자는 건지 알지. 원안대로 통과된 것으로 하시죠~.’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회의를 통해 처리하고자 하는 안건의 ‘목적’이 회의의 ‘형식’보다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거든요. 특히 처리할 사안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모임의 중요한 방향을 설정하거나 내부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조용히 있을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라도 멍석을 깔아주면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전달할지도 모르는 것이고요.
의사결정은 개인의 참여와 이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이해에서 시작됩니다.
모임에 나가면 자기주장만 하셨던 분들은 다른 사람의 말도 청해 들어보시고, 조용히만 계셨던 분들 일지라도 다음번 모임에선 자신의 목소리와 의견을 내면서 그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짜릿함을 느껴보심은 어떨는지요.
그게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