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1월 7일 칼럼 기고분)
[표지 출처 : MBC <남극의 눈물>]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 한 권이 지난해 정치권에서까지 필독서로 거론되며 베스트셀러 행진을 하고 있었지만, 관심반 무관심반으로 접하지 못하던 중, 며칠 전 TV 방송을 통해 비로소 위 책의 저자 하버드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 실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수와 학생들이 ‘공리주의’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는데, 샌델 교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예로 들며, 벤담의 양(量)적 공리주의를 비평했습니다. 샌델 교수가 자유주의나 공리주의의 대안으로 삼는 ‘공동체주의’도 결국엔 ‘공동선’을 추구하는 넓은 의미의 질(質)적 공리주의에 포함시켜 이해하는 자도 있기에, 우선 ‘공리주의’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다음으로 센델 교수가 제시하는 상황들에서 어떻게 철학과 법이 접목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공리주의’를 영미권에서는 utilitarianism이라 표기하는데, 이는 utility(효용, 실용, 편익)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에 공리주의는 실용주의 철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비용편익분석에 따라 정책 집행하는 국가나 기업경영의 지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한자권 국가에서는 공리주의(功利主義) 또는 공공성을 강조한 공리주의(公利主義)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선택의 매 순간마다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 일반인들은 ‘다 같이 잘 사는 것이 목표’라 말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공리주의 창시자 벤담은 이를 달리 표현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이 기준이 되어야 하며, 행복의 총량은 측정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례 1] ① 당신은 괘도 전차 기관사이다. 시속 100킬로로 질주하는 전차 앞에 인부 5명이 서있다. 전차를 멈출 수는 없다. 이때 오른쪽 비상 철로에는 인부가 1명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부 사례에서는 '선로원'으로 질문하기도 합니다)
② 당신은 철로를 바라보는 구경꾼이다. 저 아래 전차가 들어오고 인부 다섯 명이 앞에 있다. 브레이크가 안 듣는 전차를 멈추려면 옆에 있는 덩치 큰 남자를 아래로 밀어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결과의 효용을 중시한 공리주의에 따르면, ① 기관사의 선택은 오른쪽 비상 철로로 방향을 틀게 될 것이며, ② 구경꾼의 선택은 덩치 큰 남자를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1명의 생명보다는 5명의 생명이 우월하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기관사나 구경꾼은 ‘살인죄’로 기소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해법이 바로 위법성 조각으로 무죄가 될 수 있는 ‘긴급피난’인데, 침해되는 이익(1명의 생명) 보다 보호되는 이익(5명의 생명)이 우월하거나 적어도 법익침해의 정도가 경미하다면 균형성의 요건에 따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관사의 선택은 1명 또는 5명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결정이므로 긴급피난에 해당될 가능성이 있지만, 구경꾼의 선택은 5명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위난과 무관한 자를 희생시켰다’는 점에서 판단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에 형법학계 다수 견해는 공리주의적 사상을 다소 수정하여 구경꾼 사례와 같은 ‘공격적 긴급피난’의 경우에는 보호법익이 본질적으로 우월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데, 생명 간에는 그 우월성을 수량으로 판단할 수 없기에 긴급피난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례 2]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의 원칙은 다수결의 원칙과도 맥을 같이 하는데, 모든 경우에 다수결의 원칙은 관철되어야 하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수결의 형태가 공동체의 주된 의사결정방법으로 채택되어 왔습니다. 이는 다수의 의사가 합리적일 가능성이 크거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용이하다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중대한 의사결정에 대해서는 만장일치를 결의의 요건으로 하여 결정에 반대하는 소수가 있다면 어떻게든 설득시켜서라도 일치를 봐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수학 문제 정답과 같은 ‘객관적 진리’나 사람의 생사와 같은 ‘본질적 가치’는 다수결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본질적 가치’의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조직이 커질수록 만장일치제를 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요. 이에 현대 법철학은 다수의 결정이 반드시 내용적 합리성을 보장해주지는 못할 뿐 아니라 다수에 억압되는 소수의 입장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절차적 정당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멘트] 현대철학의 흐름을 볼 때 니체는 ‘무엇을 묻느냐’보다 ‘왜 그것을 묻는지’를 중시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은 고전철학에서 도외시했던 ‘언어’ 자체에 중점을 두었다고 하구요.
이렇게 사물의 내용 이외에 형식이나 틀에 관심을 두는 경향은 현대 과학이나 수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법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공동체 사회에서 인정되는 최선의 가치라고 전제하면, ‘최대 행복’은 내용이고, ‘최대 다수’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종전에는 ‘다수가 원하는 행복이면 된다’는 입장이었다면, 최근에는 ‘다수가 형성되는 과정’ 자체를 중시하기에 이르러 ‘절차적 정당성’이 현대 법학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법률안․예산안 날치기 통과와 같은 현상을 볼 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