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형섭 Mar 12. 2020

[인생영화 리뷰] 밀리언 달러 베이비

타인이 가족이 될 때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인상 깊게 본 것은 첫째, 가슴속에 품은 꿈을 이것저것 재지 않고 열정적으로 나아가는 주인공 메기 피츠제럴드(힐러리 스웽크 분, 이하 메기)가 멋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드라마, 예능 등의 대중문화콘텐츠에서는 캐릭터가 매우 중요한데, 언더독이면서 자기 소신을 지키고 꿋꿋이 나아가는 캐릭터는 예나 지금이나 인기를 끈다고 생각한다. 하늘을 걷는 남자의 펠리페 페팃(조셉 고든 레빗 분)과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JTBC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박서준 분)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가치관이나 신념은 '나도 닮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하며 대다수 시청자와 관객들은 이런 캐릭터의 매력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를 소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가 요즈음 많은 이들에게 '인생 캐릭터'로 등극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소신과 신념을 똘똘 뭉친 소위 '언더독'에 관한 서사는 수없이 많이 보았다. 고전 명작인 록키를 비롯하여, 몇 년 전 많은 직장인들의 애환과 공감을 끌어냈던 TVN 드라마 미생, 그리고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SBS의 스토브리그와 TVN의 블랙독까지, 언더독의 역경 극복은 언제나 내게 공감과 울림을 주었다. 나아가 이 작품들의 인기가 증명하듯,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아마 대다수 우리는 언더독이며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명작으로 회자되는 진짜 이유는 메기와 그의 권투 코치 프랭크(클린트 이스트우드 분)와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주인공의 역경 극복이 주요 서사면 영화 구조상, 이뤄야 할 목표가 처음에 제시되고 영화 후반부까지 주인공을 방해하는 여러 방해물들을 차례차례 극복해야 하는 형태겠지만 이 영화는 아니다. 메기가 현재 처한 상황(생활고, 자신을 받아주는 체육관은 어디에도 없음)은 영화의 1/3 가량 도달했을 때 해소되거니와 메기는 성실함과 재능으로 급격하게 실력을 쌓고 승승장구한다. 고난의 정도가 주인공이 가진 능력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맛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전통적인 형태의 역경 극복기가 아닌 메기와 프랭크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통해 이 영화만의 진한 농도를 만들고 있다.


프랭크는 믿었던 자신의 선수에게 타이틀 샷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뒤통수를 맞은 노년의 권투 코치다. 자신 때문에 에디(모건 프리먼 분)가 경기에서 한쪽 눈을 실명한 것이 트라우마와 죄책감이 되어, 선수에게 위험한 경기는 추진조차 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메기를 쉽사리 자신의 선수로 들이지 않지만 끝내 메기의 진심 어린 마음과 열정 때문에 그녀를 선수로써 키운다. 그러나 영화의 2/3 지점, 타이틀 매치에서 끝내 메기는 상대편 선수의 반칙으로 인해 뇌에 충격을 받아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이런 드라마틱한 반전이(사실 어느 정도 암시가 되었지만) 결말 부분이 아닌 2/3 지점에 위치한 것은 반전 자체가 '끝'이 아니라 '그 이후'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선수로 받지 않겠다던 프랭크가 이제는 '나의 혈육'처럼 메기를 소중히 여기게 된 것, 프랭크 덕에 한 평생 꿈을 이뤘고 넓은 세상을 봤기에 더 이상 여한 없이 산소 호흡기를 떼 달라는 메기의 부탁이 이 영화의 결말인데, 이는 결국 중심인물 간의 감정적 교류로 영화는 끝맺음을 의미한다. 전통의 역경 극복기처럼 모든 방해물을 다 이겨내는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연속적인 드라마틱한 전개보다는 메인 캐릭터 두 명의 감정과 관계의 변화가 영화를 꽉 채운다. 이 영화의 후기에 대부분 영화 후반부와 결말(특히 나의 혈육이라는 뜻의 모쿠슈라라는 대사)이 회자되는 것을 보면, 끝까지 메인 캐릭터 두 명에 집중한 감독의 뚝심 있는 연출이 제대로 먹힌 셈이다. 결국 이 영화는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의 카타르시스를 함께하는 것이 아닌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전부가 되어버린 '타인'에 관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감독이자 주연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절제의 방식을 통해 영화의 결말을 암시한다. 메기를 안락사시키기 위해 프랭크는 주사기를 준비하는데, 가방에 담긴 주사기는 분명 두 개였고 그것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그리곤 이후 프랭크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머지 주사기 하나가 프랭크 자신을 위한 것(자살)이었음을 관객은 알 수 있다. 자기 몸에 주사를 놓는 장면을 통해 비극적 정서를 극대화할 수 있지만 감독은 이를 과감히 빼고 주사기 클로즈업 한 컷으로 암시한 것이다. 끝까지 노련한 노장의 연출 방식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