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은 문을 닫았고, 나는 인생 우동을 만났다

후쿠오카 유랑기 3박4일

by Song 블루오리온

통유리창 너머로 세상이 분주하게 흘러간다.

후쿠오카 하카타역 옆 스타벅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행인들과 딱 10미터의 거리를 둔 채 앉아 있자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정지화면으로 감상하는 기분이 든다.

중앙의 긴 테이블에는 노트북을 펼친 청년들이 무언가에 몰입해 있고, 한쪽에서는 중년의 비즈니스맨들이 진지한 회의를 마치고 자리를 턴다. 그 틈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는 여성들까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이 도시 특유의 조심스러운 공기가 나쁘지 않다. 지난 며칠간의 여정을 복기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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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의 배신이 주는 짜릿함

사업을 하며 '계획'과 '효율'이라는 궤도 위에서 살았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그 궤도를 살짝 이탈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처형의 깜짝 등장부터가 그랬다. 2미터 앞에서 딱 멈춰 서서 우리를 놀래키던 그 장난스러운 찰나. 그 순간부터 이미 이번 여행은 '예상 밖의 즐거움'으로 흘러갈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5명이 배불리 먹고도 10만 원이 채 안 나오던 스시로에서의 경이로운 가성비는 서막에 불과했다. 하이라이트는 '건담'이었다. 야심 차게 찾아간 대형 건담 쇼핑몰 입구에 걸린 'Closed'. "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라며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실망은 길지 않았다. 발길을 돌려 들어간 평범한 이온몰 푸드코트에서 인생 최고의 우동을 만났으니까.

완벽한 계획표에선 결코 만날 수 없던 맛이다. 인생이라는 비즈니스도 가끔은 폐점된 문 앞에서 기꺼이 돌아서야 더 맛있는 우동집을 발견하는 법이라는 걸, 후쿠오카의 밤거리가 가르쳐주었다.




지도를 꺼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아내가 그토록 원했던 시골 마을의 무인양품 매장을 찾아가는 길은 한 편의 로드무비 같았다. 내비게이션조차 갈팡질팡하는 깊은 골짜기와 전통 가옥들 사이를 지나며 우리는 '이거 새로운 걸'하는 마음으로 액셀을 밟았다.

그렇게 도착한 스타벅스 히타점 옆, 거짓말처럼 펼쳐진 광활한 무인양품 매장은 그 자체로 보상이었다. 그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온 듯한 여학생들을 보며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주택과와 이곳까지의 거리는 꽤 된다. 자동차없이는 쉽지 않을 먼 길을 어떻게 왔을까? '도착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페달을 밟았을까? 참 이곳 시골은 시골이다. 그런데 꽤 아니 매우 넓고 세련된 매장들이 있지 않은가!




여행이 선물한 최고의 굿즈, '굿 슬립'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사지만, 나는 이번 여행에서 '습관'을 샀다. 서울에서는 아무리 비싼 값을 치러도 사기 힘들었던 '밤 12시 전 취침'과 '아침 8시 기상'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루틴 말이다.

반복되는 행동이 강렬한 감정과 만날 때 습관은 더 빠르게 내재화된다고 했던가. 오호리 공원 트랙을 뛰는 사람들의 활기, 15분 뒤에 오픈이라며 수줍게 미소 짓던 점원의 친절함, 그리고 처음 경험해 본 짜릿한 시골길 드라이브의 스릴까지. 이 모든 생경한 감각들이 내 몸에 닿아 '일찍 일어나는 즐거움'을 각인시켰다. 이렇게 3일만 반복해도 새로운 습관의 시작이 될 것이다. 더구나 아주 즐거운 감정의 경험까지 더해지면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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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항해를 준비하며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8시가 넘자 아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투자 중인 기업의 실적 발표 시간. 사업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서의 치열한 싸움이라면, 투자는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겸손의 영역이다. 집중하는 아내의 옆모습을 보며, 나 또한 나의 정체성과 마음가짐을 조용히 정돈해 본다.

2026년 원하는 목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고객들 그리고 그들의 최고 파트너 '넥스트스타'.

누군가는 이제 '천천히 가도 되잖아?'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이듦에 대한 다른 관점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쌓아온 경험과 배움에 대한 관점이다.

가끔 아내에게 '당신은 언제가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해?'라고 물으면 늘 '지금'이라고 답한다. 20대 청년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물어도 지금이 좋다고 한다. 사실 꽤나 충격적인 답변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현재야말로 그동안 축적해온 지성과 성숙해지는 따뜻한 감성이 만나는 내 인생 가장 훌륭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울 골든타임에 있다는 것을.




하카타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며, 나는 이 여행의 여유를 서울행 캐리어에 담는다.

비즈니스맨의 예리함과 여행자의 낭만을 동시에 품은 채, 나의 세컨드 라이프는 이제 막 하카타의 아침처럼 활기차게 이륙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멋지게 날아오르는 2026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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