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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데레사 Mar 15. 2019

유능한 초등교사는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는가

별거 아닌 것의 힘



원래는 댄 히스의 ‘순간의 힘’을 보려고 도서관에 갔는데 제자리에 없어서 꿩 대신 닭으로 빌린 책이었다. 다시 말해 별 기대 없이 빌린 책이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줄을 긋고 접을 데가 그렇게 많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답답해서 그 길로 중고서점을 가서 사 보게 되었다.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대단한 능력이다. 너무 당연해서 흔하고 식상한 말이지만 어느 맥락 안에서는 수천 배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데 그 맥락을 찾는 내공은 단기간에 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도 사실 '책을 많이 읽혀라', '여행을 다녀라', '어린이들의 능력은 무한대이다' 등등. 누구든 알고 있고 수긍하는 말들이 그득 하지만 어떻게 그러한지 제대로 풀어내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됐을 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들은 "오늘 학교에서 어땠니? 누구랑 놀았어? 오늘 배운 건 뭐니?" 주로 이런 것만 묻게 된다. 그러나 경험이 풍부한 선생님들은 이구동성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전한다. "오늘 친구들은 무슨 이야기를 했니? 친구들과는 사이좋게 잘 지냈니?"


말로는 초등 성적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만 행복하면 된다고들 하지만 친구들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놓고 자녀의 학교 생활을 살피는 것은 별개의 일인 듯 멀다. 나부터 반성을 했다. 이 문구를 읽고는 바로 전번의 질문은 의식적으로 지우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쉽게 안 바뀔 거라면 내가 해주고 말지'라는 생각을 버리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1학년 때 우느라 대답도 못하던 아이가 6학년이 돼 전교회장이 되는가 하면, 학기초에는 발표하는 걸 너무나 힘들어하던 아이가 학기말이 되자 학급회의를 열자고 제안하기도 할 정도로, 아이들의 성장 가능성은 무한대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렸을 적에 비해서 성격이 많이 변했다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사실 나도 아직까지 고지식하고 숫기가 없지만 어린이 시절을 같이 놓고 본다면 질문을 하거나 기호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놀랍도록 적극적으로 변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내 아이가 지금은 이래도 나중에는 어떻게 변할 거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가 쉽지 않다. 왜 일까? 편하고 싶어서다. 편하려면 모든 것이 예측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인류가 전쟁을 벌이는 원대한 사건은 차치하고라도 당장 부모가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녀와 함께 안정적으로 먹고 자고 생활하기 위해서다. 오늘 먹은 밥 내일도 먹어야 배고프지 않고 지난밤 편하게 쉴 수 있었던 침실이 내일도 온전해야 어두운 밤 추위와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은 그렇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변한다는 것은 -물론 특정 기질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명하지만 내가 예측하기 쉽지 않다. 예측하기 위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려면 에너지가 많이 들기도 하거니와 나 자신 조차 명확히 살피기 힘들지 않은가? 그러니 하교하면 다시 학원을 보내고 간식 주고 밥 해먹이고 숙제 검사하고 재우는 편이 편하다. 사실 그러기도 버거운 세상이다. 예측하기 힘들면 믿고 배려해야 한다. 무엇이든 실패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해 볼 기회를 만들어 주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게 진짜 자기 주도 학습이다.


어릴 때부터 놀이든 공부든 매사 적당히, 평균 이상만 하면 된다는 인식을 심어줘서는 전류가 흐를 만큼의 짜릿한 몰입을 평생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 또한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인생의 모토가 '뭐든지 중간 이상만 하면 된다'였다. 하지만 훌륭하신 선배 교사분들을 뵈면서 '나쁘지 않은 인생은 나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책은 너무 유명하다. 그래서 다들 '몰입'에만 열을 올리는 경향이 있지만, 이 구절에서 나는 '중간'이라는 개념에 방점을 찍고 싶다. 언젠가 유튜브 뼈아대 채널에서 본 영상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TZ8RgAZ0uI

통계 그래프의 분포상 중간값을, 불교의 중도 사상을 미덕인양 그대로 인생에 적용한다면 임계치를 넘어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과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명학하게 인지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SAT, ACT 만점의 비결을 묻는다면, 나 역시 첫째로 체력관리를 꼽을 것이다. 사실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한 사항인데, 의외로 많은 친구들이 컨디션 조절을 못해서 시험을 망친다. 특히 동양계 학생들의 경우 어릴 때는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다가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뒤처지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체력 싸움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반면 아주 어릴 때부터 스포츠로 체력을 단련시켜온 미국 아이들은 공부의 양이 많아지고 공부시간이 늘어나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


책 본문에 있던 <<공부는 내 인생에 대한 예의다 -이형진 저->>의 인용구를 그대로 옮겨 보았다. 공부를 위한 체력이라는 점에서만 보면 어쩌면 반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건전한 정신을 전제하는 건강한 체력만 하더라도 한 인생을 관통하는 큰 자산임에 분명하거니와 하물며 학업을 하는 경우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니 매일 문제집 푸는 몇 시간을 맞바꾸더라도 남는 거래가 될 것이다. 아이들이 영유아 때 몬테소리 선생님을 모셔와 소근육 운동에 목메달고 안달복달하면서도 막상 미세먼지 없이 상쾌한 날 아이들과의 외출을 거침없이 미루었던 지난날을 통렬하게 반성하게 되는 순간이다.


장래희망이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선생님으로 소망이 연결돼야 합니다. 꿈이 있다면 살아야 할 이유와 배워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아이들에게 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 주세요.


내가 한동안 끔찍이 싫어했던 말이 '인재'이고 장래희망이 직업이 되는 세태였다. 아직도 일부분 그 견지는 유지하고 있지만 반 이상은 비 인간적으로 치닫는 교육을 경계하고자 맹목적인 반대급부로의 선회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꿈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며 인간이지만 동시에 경제활동을 하는 주체로서 기업에서 인재, 소모품 취급을 받는 면모가 아주 틀린 처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성인이 됨으로써 경제주체가 된다는 운명을 받아들일 양이면  쉽게 교체되지 않는 특출 난 재능을 가진 인재가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만 장래에 희망하는 직업을 꿈꾸는 데에 있어서 의미부여를 할 줄 알게 된다면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따를 수 있을 것이고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자녀는 부모가 일방적으로 그리는대로 그려지는, 채우는 대로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다.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상호 성장하는 더할 나위 없는 성장 파트너이자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관계임을 잊지 않고 겸손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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