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살 조카의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여느 때처럼 지친 주말이었다. 최근 이직을 한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느라 녹초가 되어있었다. 생각해보면 '익숙함'이란 참 좋은 것이다. 우리는 막상 그 익숙함을 잃어버린 후에 그것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듯하다. 모든 소중한 것들이 그렇듯이. 나는 주말에 실신한 듯 자다가 놀러 온 9살 조카 서현이 때문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서현이는 요즘 부쩍 야위고 우루사 광고에 나오는 아저씨 같은 내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삼촌, 밥 좀 많이 먹어요. 갈수록 마르는 것 같아요. 여자들은 마른 남자 안 좋아해요."
최근 나의 브런치 글들을 모두 읽은 서현이는 순식간에 연애에 대한 자기주장이 생긴 듯 이런저런 의견을 펼치곤 했다. 그러고 나서는 내게 연애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들을 하기 시작했다. 얄미운 녀석.
"서현아, 배고픈데 스타벅스 갈래? 삼촌이 마카롱 사줄게."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신여성 서현이는 대답 없이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스타벅스로 향했다.
스타벅스 직원 일부는 이제 나와 서현이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고, 때로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 첫인사는 대부분 짐작이 가시겠지만 바로 그것이었다.
"따님이 참 총명해 보이세요. 좋으시겠어요."
더욱 얄미운 것은 이서현이었다. 옆에서 흐흐흐 거리며 반발도 하지 않고 총각 삼촌을 애아빠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 아이는 내 조카라는 사실을 장황한 문장으로 토로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그렇게 억울했나 보다. 그날도 우리는 카운터 앞에서 주문을 기다렸고, 평소 잘 알던 직원이 우리를 응대했다.
"또 오셨네요. 서현아 안녕?"
그녀의 닉네임은 '퓨리오사'다. 퓨리오사는 정말 매드 맥스에 나왔던 샤를리즈 테론처럼 당당함이 가득한 여성이었다. 느낌이 약간 풀 성장한 서현이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두 명은 극히 잘 맞는지 시너지를 창출하곤 했다.
"서현아, 라즈베리 마카롱 줄까? 내가 1개 남겨두었어."
"네, 퓨리오사 언니는 역시 센스가 남다르세요."
아파트 부녀회 같은 이 대화가 나는 당황스러웠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나는 음료를 받아 자리로 갔다. 서현이는 마술사처럼 언제 포장을 찢었는지 이미 마카롱을 입에 넣고 있었다. 그녀는 우물우물 행복 가득한 표정으로 마카롱을 먹다 나를 응시했다. 저 눈.. 내가 싫어하는 우리 사촌 누나의 그 눈이었다. 과거엔 군사정권에 대항에서 화염병을 눈으로 불 붙였던 그녀는 이제 비난의 대상을 나로 일삼고 있었다. 유전자의 힘을 과시하는 듯 서현이는 내게 불현듯 물었다.
"삼촌, 사랑이 정확하게 뭐예요?"
당황스러웠다. 서현이는 지금 질문에 대답할 스승을 잘못 고른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예전 대통령에게 민주주의가 뭐냐고 묻는 듯한 발언에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글쎄, 삼촌이 봤을 때는 말이야. 내 가족, 나 자신보다 누굴 더 좋아하게 되면 그게 사랑인 것 같아. 그런데 생각보다 그런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아. 그 사람을 제대로 알아갈 기회를 갖는 것도 어렵고, 서로 잘 맞는 공감대가 풍부한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 어려운 것이지. 그래서 서현이도 나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 잘 고민해봐. 그냥 생각 없이 인연따라 만나다 보면 그만큼 진정한 기회는 저 멀리 멀어졌을지도 몰라."
서현이는 당최 무슨 도그사운드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시촌에 인기 없는 강사가 된 듯한 기분으로 다시 설명을 준비해야만 했다.
"음.. 그러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누가 좋아질 때가 있어. 예를 들어볼까? 민준이 있잖아. 네가 피아노 잘 친다고 좋아했던 애."
"나 민준이 안 좋아하는데요."
"진짜?"
"네, 그냥 친구예요."
"너 만약 민준이가 다른 애랑 만나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순간 서현이는 화염병을 던질 듯한 눈빛을 보이며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해했어요. 사랑이 뭔지."
나는 할 말을 잃은 체 서현이를 쳐다보면 말했다.
"너 근데 9살 맞니?"
서현이는 동네에 개가 짖는다는 듯 바닐라 프라푸치노를 연신 먹기 시작했다.
사실 서현이의 학업성적은 매우 우수하다고 한다. 친척 누나는 서현이가 최소 스탠퍼드는 갈 거 같다는 망언을 하곤 했는데, 서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내가 보기에도 이 아이는 영특한 구석이 많았다. 한 번은 영화 [여인의 향기]를 같이 보는데 서현이는 그런 말을 했었다.
"저 할아버지의 어둠은 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어디서 시작되었는데?"
나는 흥미롭게 내 조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현이의 대답은 꽤나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는다.
"누구도 밝은 곳의 자신을 봐주지 않으니까 어두워진 거예요."
나는 순간 우리 사촌누나가 로또를 제대로 긁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9살 조카와 사랑에 대해 논의하게 된 스타벅스로 돌아가 보자. 민준이로 사랑을 이해하게 된 서현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늘 그렇듯 스타벅스에 배치된 잡지들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서현이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다 스스로가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 본인의 인생이다. 나의 사랑은 어려웠고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서현이의 사랑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고 행복할지도 모를 일이다. 내 사랑하는 조카는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는 평소 좋아하는 샷이 추가된 라테를 마시며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서현이는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나 삼촌 사랑 이야기 하나 듣고 싶어요. 아무거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어떻게 하나 이상이라고 생각하냐? 서현아."
서현이는 트레이드 마크인 썩소를 날리며 말했다.
"엄마가 삼촌은 보급형 남자라 여자들이 은근히 편하게 생각해서 연애를 못 해보지는 않았다고 했어요."
나는 내 사촌누나가 벼락을 맞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