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희미해진 그날의 소개팅을 이야기하다
마카롱을 게걸스럽게 먹으며 나를 응시하는 서현이를 보며, 나는 그 날의 소개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초봄의 어느 날이었다. 더 이상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조차 무덤덤해지는 시기,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잃고, 함께 감정을 나눈 동지도 잃어버린 체 난 그렇게 봄을 맞았다.
회사 책상에서 일을 하는 듯이 위장을 하고 있던 나에게 동료 Y가 갑자기 물었다.
"최 주임님, 소개팅 한번 해봅시다."
새마을운동을 장려하는 듯한 그녀의 제안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주선자인 Y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그녀는 자유분방한 영혼이다. 딱히 주변 사람들의 평판이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에 그녀는 회사 내에서 신선한 이단아로 통했다. 다행인 것은 여느 이탈자들과 다르게 그녀에게는 늘 선을 넘을 듯한 말 듯한 균형감각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자유분방함은 쿨하다는 인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Y와 그렇게 친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제안이 낯설고 의심스러웠다.
"갑자기 왜요? 제가 처량해 보이나요?"
30대 중반을 향하는 솔로남은 이제 피해의식까지 가득한 불쌍한 녀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Y는 재치 있게 그런 나의 질문을 받아주었다.
"제 친구가 있는데 애가 진짜 괜찮거든요. 근데 주임님처럼 이성친구가 없어요. 요즘은 연애를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 둘이 만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평소 업무 속도가 느리기로 유명한 Y였다. 나는 그 이유가 뭔지 해답을 찾음과 동시에 새로운 희망에 마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음... 소개팅을 한지 오래되었는데... 괜찮을까요? 사진 있어요?"
매번 비포 선라이즈의 사랑을 꿈꾼다는 나였지만 여전한 속물근성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Y는 뚝딱하며 핸드폰에서 사진을 찾아 내게 보여주었다. 늘 그렇듯 운명은 어느 순간에는 무척 쉽게 진행된다.
"네, 만나볼게요."
"하여간 남자들이란!"
서현이는 먹던 마카롱을 토해내며 나를 비난했다. 나는 여전히 이 녀석의 나이가 의심스럽다. 친척 누나의 배속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태어난 것이 아닐까? 서현이는 분노를 마카롱으로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사진을 보니까 이뻤던 거죠? 삼촌."
"전형적인 미인은 아닌데.. 왜 있잖아. 사람마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는데 그분은 삼촌의 이상형과 무척 비슷했어."
"그게 이쁘다는 거예요. 전문용어로."
서현이는 궁예가 불쌍한 중생들을 쳐다보듯 내게 말했다. 그리고 불쌍한 중생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약속 당일은 수요일이었다. 마침 부서 내 바쁜 업무로 나는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지만, 저녁에 소개팅을 가야 한다는 의지로 분노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 오후 5시가 되었다. 정식 퇴근시간이지만 아무도 퇴근하지 않는 5시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님께 갔다. 부장님은 역시나 가장 친한 친구인 네이버에게 쓸데없는 질문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부장님께 간첩이 접선하듯 최대한 조용히 말을 건넸다.
"부장님, 저 오늘 선약이 있어서 일찍 들어가 보겠습니다."
평소 과묵한 성격의 부장님은 모니터만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소개팅 잘해."
나는 당황했다. 누구에게도 오늘의 소개팅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부장님은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대답했던 것이다. 나는 되지도 않는 연기를 시도한다.
"엇.. 소개팅 아닙니다."
"그럼 선인가? 그래.. 이제 최주임도 그럴 나이가 되었지. 어른들 소개니까 진중하도록 해."
순식간에 공식 소개남이 된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인사를 하고 회사를 뛰쳐나갔다. 어느덧 내 나이는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단순한 삶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가진 채 나는 그렇게 약속 장소로 갔다.
나는 그렇게 그녀를 만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첫 만남의 기억들이 조각들처럼 남아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올라오던 그녀의 모습,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던 싸구려 레스토랑 그리고 주차장에서 차를 타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던 장면. 시간이 지나가면 디테일을 사라지고 순간의 장면들만 남아버린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아주 맘에 들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친구 곰팡이에게 연락을 받았다.
"소개팅 한번 해볼래? 괜찮은 사람을 발견했어."
나는 아무런 근거도 확신도 없이 친구 녀석에게 향후의 진로를 이야기했다.
"아니, 당분간은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그렇게 나의 봄은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버렸다.
서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저 빠져버릴 듯한 눈빛에서 또 어떤 주옥같은 질문들이 나올까 나는 두려워졌다.
"어떤 점이 삼촌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처음 봤는데 뭔가 느낌이 온 거예요?"
"글쎄, 사실 그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다시 만나고 싶었던 것 같아. 더 알아보고 싶고. 사실 첫 만남에서 크게 거슬리는 게 없고, 외향적인 부분이 맘에 든다면 누구나 다시 보려고 할 거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1단계 조차 넘기가 쉽지 않거든."
"삼촌도 그런 1단계를 넘지 못한 적이 많았어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창 밖으로 건물들을 응시했다. 그저 그런 건물들이 나를 더욱 처량하게 만든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사진도 보고 기본적인 정보도 먼저 공유하려 해. 적어도 나가서 '아, 정말 의미 없는 만남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하거든. 문제는 그렇게 사진을 보고 대략의 신상정보를 알아도 실제로 느껴지는 사람들은 다 제각각인 거야. 어찌 보면 소개팅은 무모한 확률게임인 셈이지."
다소 난해한 나의 설명에 서현이는 나름 고뇌에 빠진 듯 생각에 잠겼다. 더 이상 그녀에게 힘을 내어줄 라즈베리 마카롱도 식성 좋은 어린이에게 멸종된 상태였다. 서현이는 순간 고개를 들더니 내게 물었다.
"그럼 도대체 그런 소개팅을 왜 하는 거예요?"
나는 창 밖으로 서서히 움직이는 구름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회에서 인연을 만날 수는 있는 창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을 택하지. 그 선택에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 그 확률이 무척 낮은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을 말이야."
그렇게 나는 두 번째 만남을 위해 가로수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항상 먼저 도착하는 것을 즐기는 나는 여유 있게 도착하여 거울을 보았다. 지나버린 세월을 한탄하며 최대한의 용모를 꾸며내려 노력했다. 그녀는 다소 늦을 거 같다며 문자를 보냈고 덕분에 나는 50분 가까이 일찍 와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나는 순간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버렸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지, 지나가는 저 커플은 어떻게 만났을까, 오늘은 뭐 먹지 등 잡념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해요."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이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우리는 이미 만나서 밥까지 먹을 사이였건만, 그녀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존재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제가 시간 계산을 잘못했어요."
평소 같았으면 수리영역이 몇 등급이었냐고 물었을 나였지만 왠지 그날은 순딩 순딩 했다.
"아니에요. 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가실까요?"
50분을 넘게 기다리느라 모든 것이 지루해진 상태였지만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뭔가 활기를 되찾은 듯했다. 그리고 우리는 늦은 점심식사를 하였다. 낮에 보는 그녀의 모습은 이전보다 좀 더 명확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나름의 예의와 총명한 듯한 눈빛을 가진 그녀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시간을 빠르게 움직였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길을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본인들의 인생 대소사를 정리해 이야기했다. 사소한 취미부터 다소 중요했던 사건들까지 나오면서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묻히며 즐거워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이 사람이면 좋겠다는 또다시 근거 없는 확신을 그렇게 내려버렸다.
서현이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 세상의 모든 색을 담은 듯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은 서현이는 다소 즐거운 걸음걸이와 함께 내게 물었다.
"그래서 둘은 사귄 거예요?"
역시나 내 친척 누나의 딸답게 그녀는 오승환 직구 던지듯 내게 물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술술 대답해버렸다. 어느덧 서현이는 내게 중요한 친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응, 우리는 세 번째 만났을 때 사귀게 되었어."
"세 번째에는 뭐 했는데요? 삼촌."
나는 순간적으로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시작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쉽게 생각하고 결정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지도 못했다. 앞으로의 시간들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계획도 없던 시기였다. 세 번의 만남에서 이야기가 잘 통한다고 판단했고, 향후의 만남에서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 결론지어 버렸다. 사랑에 대해 뭐 그리 세세하게 고민할 수 있냐며 비난할 사람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서른 중 반이라는 나이에서 나에게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하는 책임감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나는 Lesson Learned도 잊어버려고 그렇게 다시 쉽게 사랑을 시작해버렸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