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가 사지르가 된 이유
우리는 회사에서 권장하는 연차 소진을 위해 여행을 결정했다. 사지르는 문득 가까운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5번이나 방문했던 일본의 지도를 구글로 다시 살펴 보았다. 참으로 여행을 짜기 편한 나라였다. 가깝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의 퀄리티가 좋고, 그리고 무엇보다 편했다. 익숙함이란 때로는 무엇보다 강한 동기가 된다. 나는 수년 전 혼자 오사카와 교토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교토가 맘에 들어 오사카 외에는 다른 주변 도시를 돌아보지 못했는데, 그중에서도 고베라는 곳이 가장 미련이 남았다. 작고 아기자기한 항구도시. 그 표현 한마디에 나는 이번 여행의 목적지를 고베로 잡았다.
사지르는 나도 동갑인 30대 중반의 경상도 남자이다. 그는 서울 출신인 내가 보기에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이다. 평소 말수가 많지 않으며, 표현이 서툴고 다소 투박하다. 그러나 속마음은 사골국처럼 진국인 녀석. 역시나 술과 친구를 좋아했다. 나는 이 녀석에게 평소 친구이면서도 묘하게 의지되는 형 같은 면을 느꼈고, 입사 후 급격하게 친해졌다. 나는 그와 대화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짝퉁 사투리를 하곤 했는데 아직도 내가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가짜 사투리) 니 어데 가고 싶노?"
"(진짜 사투리) 아무데나 가자. 난 상관없다."
그래서 나는 고베 2일 + 오사카 1일이라는 단순한 일정으로 일본 여행을 기획했고 우리는 그렇게 여행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끔 궁금해한다. 왜 그의 별명이 사자르인지. 그 별명은 여행 초기에 시작되었다.
간사이 공항에 내린 우린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고베에 도착했다. 북적이는 도심에 내린 우리는 호텔 버스를 타고 바닷가 근처 호텔로 갔다. 호텔방에서 훤히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이번 여행이 꽤나 시작이 좋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무더위와 다르게 나름 시원하고 아름다운 바다가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사지르가 말했다.
"(진짜 사투리) 내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가짜 사투리) 어데 아프노?"
"(진짜 사투리) 내 술만 마시면 다음날 장이 안 좋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평소 주당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맥주 마니아이자 소주혐오가인 내게 "맥주는 배가 부르며 취하지 않는 술"이라는 그의 평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래, 신은 그에게 간을 주셨지만 장은 주지 않으셨구나.."
나는 빨리 생각을 접고 창 밖에 바다를 응시했다. 나는 사실 여행 직전 있었던 소개팅으로 다소 기분이 우울한 상황이었다. 즐거운 시간 이후 주고받은 카톡에서 나는 그녀가 내게 관심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내가 마음에 있는 사람에게 느끼는 나에 대한 무관심. 그것은 타노스의 손가락 튕김보다 마음 아픈 몸짓이었다. 울적한 마음에 바다를 응시하고 있을 그때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쾅쾅 우르르 쾅쾅쾅 우오오오오 크아아아아아
나는 최대한 그 소리를 미화하였지만, 그것은 사지르가 만들어내는 화장실 협주곡이었다. 내 상념과 우울함은 그의 더러운 연주로 금세 사라지며 이 여행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는 전투 후 화장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진짜 사투리) 아, 되네 정말. 오늘 저녁은 뭐 묵을까?"
"(가짜 사투리) 니는 그렇게 싸지르고도 또 술 먹고 싶나?"
"(진짜 사투리) 그럼 여기 왜 왔는데? 아 잠깐만 나 다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가짜 사투리) 니 또 싸지르나?"
그렇게 그는 몇 번을 싸지른 후 사지르라는 이국적인 닉네임을 갖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다소 아랍계 부자 같은 별명을 가진 것에 대해 만족감을 보이곤 했다. 내가 느끼는 이 녀석의 귀여움을 여성분들도 느껴야 하는데.. 그것은 완전 비핵화보다 어려운 문제였다. 우리는 그렇게 여행의 Day 1을 시작했다.
화장실 전투로 안정감을 찾은 사지르와 나는 고베의 중심가를 이동했다. 여느 사내들의 여행과 다르지 않게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유일한 계획은 Day2 저녁식사로 예약한 고베규를 하는 식당이었다. 평소 좋은 음식과 과음을 즐기는 사지르가 찾은 성과물이었다. 우리는 마치 동네를 거닐 듯 발길 따라 고베를 걸었다. 아무리 중심가라도 크게 화려하지 않았다. 작고 아담한 건물들과 한적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말복이 가깝던 그날을 위해 장어덮밥을 먹으러 몇몇 맛집을 갔지만, 이미 예약이 꽉 찬 상태였다. 그래서 근처 만두집으로 들어가 가볍게 맥주를 시작했다.
우리 대화의 주된 주제는 연애였다. 30대 중반 슬슬 짝을 찾는 것이 늦어지는 시기에 두 남자는 알게 모르게 고민이 많았다. 사지르는 올해 많은 소개팅을 했다. 부산에 계신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늦은 혼사에 많은 우려를 가지신 나머지 매일 전화를 하셨다.
"어, 내다. 오데고?"
"술 마심니더."
"거기 여자도 있나?"
"다 남잡니다."
"이 문디기 자슥, 내 그리 말을 해도, XXXXXXXXXXXX"
내가 술자리에서 익숙하게 듣던 그와 어머니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인지 남정네들과의 음주만을 즐기던 그도 언제부터인가 소개팅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는 투박하지만 나이스 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충분치는 않았는지,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짧게 연애가 끝나버렸다.
"(진짜 사투리) 내는 이제 기대 안 하련다. 나름 노력하는데.. 내가 인기가 없는 스타일인가 보다."
나는 만두를 먹으며 우울해하는 친구가 안 스러웠다. 분명 장점이 많은 녀석이었다. 남자답고, 책임감 강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믿을만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단기간 평가 시스템인 소개팅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가짜 사투리) 기다려봐라. 다 인연이 있다. 내를 믿어라."
"(진짜 사투리) 니는 충분히 고생 많았다."
작년에 실연을 했던 나는 그 이후 모든 소개팅을 모두 이 녀석에게 넘겼다. 남들에게는 '아직 마음이 없다'는 되지도 않는 답변으로 거절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도 자신감이 없었다. 실연은 나를 돌아보게 하지만, 때로는 그 리뷰가 나를 더욱 작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반대급부로 사지르는 많은 소개팅을 했다. 하지만 그도 여려 실패로 인해 다소 힘이 빠진 상황이었다. 사지르는 만두 한판을 다 먹으며 내게 물었다.
"(진짜 사투리) 니는 그 분하고 잘 안된기가?"
"(가짜 사투리) 카톡을 하는데 답이 시원찮다. 분명 만났을 때는 즐거웠는데.."
나는 그녀와의 카톡의 대화에서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평범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두 번 만났던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나는 그것보다 좀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투른 남자들은 조급함에 스스로 무덤을 판다. 사지르는 이런 내가 안 쓰러웠는지 되지도 않는 위로를 건넸다.
"(진짜 사투리) 이 만두 내가 살게."
"(가짜 사투리) 이걸로 위로가 끝난기가?"
"(진짜 사투리) 아니 오늘 밤은 길다."
우리는 만두집 1차를 시작으로 호텔로 걸어오면서 총 5개의 각기 다른 술집에 들어갔다. 아무런 계획도 인터넷 검색도 없었지만, 즐겁게 취했던 우리는 그렇게 호텔에서 맥주 한 캔을 더 마시고 잠이 들었다. 먼저 취기로 침대에 누운 나는 그 녀석의 혼잣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 혼자인 것도 나쁜 건 아니다. 아 씨....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나는 상처받은 영혼의 안식을 위해 조용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 방송의 볼륨을 높였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