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와 2리터의 그녀 #4

(4) 기억된다는 것

by 최푸근

[현재, 해방촌 카페]

"선배. 저 면접 보게 되었어요."

이태원 해방촌 경사진 길가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나는 리터에게 연락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함박웃음과 함께 나는 대답했다.

"그래? 면접일이 언제인데? 잘 준비해보자."

신이 난 리터는 해방촌으로 오겠다며 나의 상세한 위치를 물었다. 그녀에게는 또 다른 활력이, 내겐 근거 없는 불안함이 공존하는 순간이었다.




리터는 학을 타고 온 듯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해방촌 카페에 도착했다. 작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밀집한 이 곳에서 나는 카페에 있는 것을 어려워한다. 대부분 좌석이 많지 않은 관계로 커피 한잔으로 죽치고 있기엔 스스로 죄스러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세 잔째 커피를 통해 카페인 왕으로 거듭날 무렵 리터의 도착으로 인해 나는 다시 아메리카노 2잔을 시켰다.

"선배. 자기소개 뭐라고 했었어요? 준비하기 제일 어려워요."

취업의 문을 두드리다 보면 우리는 18대 1의 무용담처럼 수많은 자기소개 전설들을 만나곤 한다. 항공사 면접에서 비행기 착륙 소리를 내며 두 팔을 벌렸다던 한 남자, 다짜고짜 구성진 노래 한곡을 뽑으며 면접관들을 즐겁게 하고 광탈했다는 비운의 가수 등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레전드들은 항상 재밌는 안주거리 중 하나이다. 과거 우리의 스터디에도 그런 영웅들이 있었다.


[Chapter 1] 저는 병이 있습니다

모두가 아는 한자로 이름을 풀이하면 '아픈 사람'인 내 친구는 그래서 별명이 '아픈 사람'이다. 물론 실제 한자는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한자 계몽이 안되었던 내 친구들은 그를 '아픈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친구는 모기업의 면접을 보기 전, 우리와 함께 연습을 했고, 준비해왔다는 자기소개를 호기롭게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장수생명에 지원한 이병인이라고 합니다. 저는 제 이름처럼 병이 있습니다."

면접관으로 듣고 있던 스터디원들은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기억에 남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활용하였지만 이건 황당한 기억으로 분류될 만큼 격한 혁명과도 같았다. 뜬금없이 자신의 병력을 소개하는 그를 우리는 제지했다.

"병인아.. 아무리 그래도 니가 사장이면 아픈 사람 뽑겠냐?"

마치 김밥집에서 주문을 하기도 전에 '전 돈이 없습니다'를 외친 듯한 그의 자기소개는 시작과 동시에 폐기 처분되었다. '아픈 사람'은 이렇게 즐거운 추억을 남겨주곤 한다.


[Chapter 2] 포맷

유진이는 성격이 털털했다. 먹던 고기로 인해 옷에 기름이 묻어도 손으로 쓱 닦는 임꺽정스러움을 보유했던 그녀는 그 덕분인지 스터디 내에서 항상 인기가 좋았다. 술이라도 먹는 날이면 남자들은 출석부를 뒤지는 듯 유진이가 오는지 물었다. 그녀는 꿈에 그리던 은행의 최종면접까지 간 상태였고 역시나 우리들은 긴급 소집되어 가상 면접을 봐주었다.

"안녕하십니까? 권유진입니다. 제 별명은 포맷입니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시련을 겪어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고객을 향한 서비스에는 이러한 제 성격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역경도 포맷하듯 날려버리겠습니다."

면접관들에게 판타스틱 듀오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준 유진이는 현재 나에게 적금을 강요하며 모 지점에서 근무 중이다.


[Chapter 3] 반토막

함께 스터디를 했던 '개미핥기'는 말이 빠른 사나이였다. 떨어진 죠리퐁을 순식간에 주워 먹는 그의 전광석화 같은 모습에서 우리는 그에게 '개미핥기'라는 별명을 부여했다. 그는 모든지 빨랐다. 밥도 어찌나 빨리 먹던지 여자 후배들은 '개미핥기' 선배와 밥을 먹기 싫다며 진절머리를 내곤 했다. 그랬다. 그는 항상 3분 만에 밥을 먹고 핸드폰을 보며 모두를 급체로 몰아갔던 것이다. 아무튼 그는 면접을 위해 1분짜리 자기소개를 달달 외웠다. 말이 빨랐기 때문에 방대한 양은 걱정 없었다. 그는 면접에 들어가며 1분의 '쇼미 더 머니'를 준비했다.

"자. 시간이 별로 없어서 자기소개는 30초만 부탁합니다."

면접관의 이 같은 발언에 개미핥기는 당황했다. 한편의 서사시 같은 그의 자기소개에는 기승전결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반으로 그것을 축약해야 했다. 그는 고민 끝에 1분의 자기소개를 그대로 진행하되 30초까지만 말하기로 다짐한다. 30초의 시간이 지나자 그는 자기소개를 멈췄다.

"음.. 다 한 거예요?"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무언가 남았을 거라는 꺼림칙함을 느끼며 그의 자기소개는 기약할 수 없는 'To be continued'가 되어버렸다.


사실 우리는 '자기소개'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대학생활 동안의 자기소개는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본모습과 같다. 비유와 상징 그리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우리를 나타내야 하는 사명감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면접에서는 다르다. 각자 주어진 1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잊히지 않기 위해 모두 작가가 되어간다.





[현재, 해방촌]

리터의 자기소개는 깔끔했다. 기발함은 없었지만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총명함으로 수분크림을 바른 듯 자기소개를 마쳤다. 나는 불현듯 그녀를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나는 대신 취업 컨설턴트처럼 그녀와 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 과정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깔끔하고 좋은데. 우리는 기발함보다는 일 잘할 것 같은 이미지로 가보자고. 너무 오버하지는 않는데 힘차 보이는 느낌이 좋다."

나는 그녀의 자기소개에 대해 크게 매스를 대지 않았다. 거슬리는 게 없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다.

"아 선배, 지금 귀찮으니까 대충 괜찮다는 거죠? 나도 뭐라도 할까요? 그 아픈 오빠처럼?"

나는 당황한 미소로 대답했다.

"사람마다 특징이 다르잖아. 지혜는 누가 봐도 좀 반듯한 이미지니까 자연스럽게 가자고. 그게 어울려."

"근데 선배는 어떻게 했어요? 자기소개."


[4년 전, 면접실]

PT면접을 앞두고 나는 카오스 상태였다. 2분 동안 주어진 주제에 대해 영어로 발표를 한다. 그리고 개별질문을 받는다. 개별질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영어는 부담스러웠다. 외국인이 길을 물어보면 배트맨처럼 길거리에서 사라지던 나는 늘 영어가 어려웠다. 날려 적은 스크립트를 정독하며 기나긴 2분 동안 솰라솰라를 한 나는 개별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영석 씨, 준비해온 자기소개 있으면 한번 해보세요."

나는 자신 있었다. 모두가 극찬했던 그 자기소개가 내게는 있었다. 무협지 속 전설의 검처럼 그것은 내게 유일한 무기였다. 무역회사인 이곳의 주요 업적을 숫자로 3가지 분류한 다음, 그 숫자와 나를 연관시킨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역시 한강대교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창피하지만 당시에 그것은 내 자랑이자 비밀병기였다.

"네. 저는 3가지 숫자를 통해 저를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300입니다. 전진상사는 최근 3년 사이에 300% 규모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발 사이즈가 300인 제가 이 기세를 이어가겠습니다......"

지금은 스스로 자해하고 싶은 이 소개를 하는 참에 난 한 가지를 느끼게 된다. 아무도 내 소개를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5명의 면접관들은 내 신상명세를 모니터를 통해 보고 있었다. 질문을 해야 하니 그들은 소스가 필요했다. 그래서 일단 자기소개를 시킨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정보를 훑고 있던 것이었다. 난 맥이 빠졌다. 무관중 축구경기처럼 의욕이 떨어진 나는 3가지 숫자 중 2가지만 말해버리고 대충 마무리를 지어버렸다. 난 그렇게 전가의 보도로 고구마를 썰듯 무의미한 자기소개를 끝냈다.




[현재, 해방촌]

"봐. 괜히 무리해서 준비할 필요 없어. 어떤 상황이 나올지 모르니까 깔끔하고 안정되게 가보자."

나의 일화들을 항상 재미나게 듣는 리터는 웃긴 듯 말했다.

"발이 300 사이즈인걸 왜 얘기했어요? 크크크크 신발 살 때 힘들겠네요. 크크크크"

난 실랄한 비웃음에 안정된 답변으로 화답했다.

"좀 닥쳐줄래."


Remember me!


영화 <매드 맥스>에서 Nux가 외치는 이 대사처럼 우리는 자기소개를 통해 기억되길 바란다. 하나의 질문이라도 더 얻기를 원하고, 다른 이와는 다른 차별성을 보유하고자 한다. 수많은 무용담과 전설들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리터와 나는 그 결전의 날에 기억되길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https://youtu.be/Kj7SYqKNv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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