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회사에 입사한 직후 '선배와의 대화'라는 거창한 프로그램에 강제로 투입된 적이 있었다. 5명의 신입사원들과 1명의 회사 선배가 점심식사를 하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자리였다. 우리는 사회생활의 시작을 위해 어색한 질문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한 명씩 질문을 했었고 드디어 나도 뭔가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왔다.
"선배님은 결혼하셨나요?"
"아뇨, 내년 2월에 해요."
"아 ㅋㅋ (사회적 웃음) 선배님은 형수님 어떤 점이 마음에 드셨어요?"
나는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나름의 편한 질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돌아온 선배의 대답은 사뭇 내 예상과는 달랐다.
"내가 회사원이잖아요. 그러니까 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여성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교사인 지금의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네요."
난 지금 기업 M&A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본인의 불안정한 미래를 공무원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그의 야심 찬 발언은, 코 흘리던 신입사원인 내게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4년의 사회생활을 지나왔다.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물론 그 일들 속에는 지나가버린 인연들도 존재한다. 그 선배처럼 공격적 M&A 하듯 사랑을 하진 못했다. 태생이 그것과는 맞지 않았다. 감성팔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와는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결과는 아직도 혼자라는 팩트만 남았다. 결국 나의 이상적 연애와 사랑은 철들지 못한 성인의 꿈에 불과했던 것일까? 나는 매일 밤 가벼운 조깅을 한다. 찬바람을 스치고 달리는 것은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오늘도 그렇게 달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도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닌지 말이다.
내가 겪었던 회사생활에서 이성을 만나는 방법은 크게 두 개로 존재했다. 사내연애와 소개팅. 사내연애는 알다시피 상당한 Risk가 존재한다. 그래서 몇 번 시도했던 것이 소개팅이라는 녀석이었다. 친구들은 사진 몇 장을 보내온다. 동시에 급격한 확인 및 피드백을 요청한다. 그리고는 내 사진을 몇 장 달라고 한다. 나는 이런 시작부터가 어색했다. 사진을 잘 찍지도 않는 내가 사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있는 사진이라고는 회식 때 대리님과 벌게진 얼굴로 량연량하의 <학교를 안 갔어> 댄스를 추는 사진뿐이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술에 취해 나무에 매달린 사진을 보여주라고 보낸 적이 있었다. 물론 돌아온 것은 친구의 욕뿐이었다. 아무튼 나는 어떻게든 사진을 골라 보냈다. 그리고 친구는 정부계약을 따낸 중계업자처럼 만남의 성사가 승인되었으며, 내가 공손히 연락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다음 단계도 난감하다. 어떻게 문자를 해야 하는가? 보통 이름을 말하고 만나서 반갑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약속시간을 잡는다. 장소는 항상 이태원이었다. 나는 서울의 중심은 이태원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대충 올만한 거리에 있다. 그리고 친구들과 수많은 무용담을 만들었던 이곳은 내게 '우리 동네'보다 아늑한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최선을 다해 깔끔하게 옷을 입고 이태원에 간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에 약간 울적한 감정이 든다. '나도 늙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좀 덜 씻어도 봐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조금만 덜 닦아도 얼굴에 궁색함이 가득해 보인다. 그렇게 나는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온갖 개폼을 잡아본다. 한 번은 평소 읽지도 않던 책을 액세서리 삼아 가져간 적이 있었다. 정말이지 무리한 설정이었다. 추운 겨울 어찌나 책을 던져버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싶던지.. 아무튼 그렇게 몇 명을 만났다. 사람이 모두 다른 만큼 첫인상도 다 제각각이다. 모델처럼 당당하게 걸어오던 커리어우먼도 있었다. 늦은 가을 떨어진 노란 낙엽을 머리에 꽂고 나타났던 여인도 있었다. 다들 나이스 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을 농축하며 털어놓기 시작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내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웠다. 한 가지 팩트를 이야기하지만 내가 항상 그러진 않는데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색함을 지워보려 이런저런 에피소드로 나를 완성시킨다. 그러다 보면 상대는 내가 아닌 남자를 나라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어려운 문제였다. 나도 나를 잘 모른다. 당신이 천천히 알아봐 주면 좋지만 당장에 뭔가 알려줘야 하는 의무감, 그것이 난감했다.
그렇게 나는 몇몇의 식사를 했다. 다행히 내 친구처럼 김장을 해야 해서 빨리 집에 가야 한다는 여인은 없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즐겁고 행복했던 것도 아닌 거 같다. 나는 몇몇 분들을 교통이 가능한 곳까지 데려다준다. 그리고 조심히 가라는 방범성 멘트를 날린다. 대부분 그 이후 난 해방감을 느꼈다. 상대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냥 소개팅이라는 자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열심히 팝핀댄스를 춘 기분이었다. 보통 그렇게 상대가 떠나가면 난 이어폰을 끼고 한동안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비포 선라이즈> 같은 영화에 너무 심취했던 것이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소개팅으로 누굴 만나기 어려운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유럽 열차를 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난감했다. 또다시 지지리 궁상을 떨어본다. 좋아하는 음악들 사이로 연인들이 지나간다. '이 세상에 외로운 것은 너 밖에 없어. lol'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들의 지나감에 음악의 볼륨을 높이며 애써 무시하려 애써본다.
2017년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는, 요청하지도 않은 새해인사가 카톡으로 쏟아진다. 꺼지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고맙다며 나도 의미 없는 안부를 전했다. 가끔씩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좋은 사람을 기다릴 만큼 좋은 사람이니? 글쎄, 모르겠다. 아니어서 지금까지 이런 것일 수도 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다시 살아도 더 나아지진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내 실천력의 수준을 인지하기 때문에.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새해의 다짐을 세워본다. 좋은 사람이 되어가자. 그러다 보면 좋은 인연도 오지 않겠나 하는 터무니없는 긍정으로 결론을 지어버렸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한 가지 진화일까?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을 찾는 것에서, 되는 것에 목표를 두고 Day-1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