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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푸근 Jan 03. 2017

복덕방 손님과 신신병자

사람을 믿기가 어려워질 때

연말이면 누구나 한 번쯤 좋은 사람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다지 낙이란 것이 없어 보이던 나의 연말이었지만, 문득 소중한 사람들이 보고 싶어 진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친구 '곰팡이'와 대학 후배인 '신신병자'를 불러 평소 좋아하던 막걸리집으로 갔다.


[등장인물]

곰팡이 : a.k.a. 우천 취소, 대학 때 비가 오면 학교를 오지 않아 '우천 취소'라는 별명도 함께 가지고 있다. 석사과정 중인 이 시대의 신지식인으로, 최근 설현을 직접 보았다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보였다. 지식인다운 모습이었다.


신신병자 : 놀랍게도 여자 멤버이다. 그녀의 이름에는 '신'이 많이 들어간다. 외국계 회사에 일하는 열정 가득한 커리어우먼으로서 놀라울 정도로 친화력이 좋다. 약간의 조울증과 뜬금없는 연락두절로 인해 친절한 우리들은 그녀에게 '신신병자'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용팔이 : 지은이다. 삶의 낙을 자꾸 이러한 멤버들과 찾으려 한다. 감성은 풍부하나 결실은 없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스스로 진보적 인간이라 주장하지만, 곰팡이는 진보는커녕 강기갑 씨의 활극만을 보유한 존재라 폄하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 때나 책상으로 공중 부양하지는 않는다.




그날은 12월 30일이었다. 군 시절에 후임들을 과도하게 배려하는 선임 병장이라는 악평 아닌 악평을 들었던 나는 31일은 피하고 싶었다. 곰팡이와 신신병자가 가족과 시간을 보낼 것이란 예상 때문이었다. 항상 약속 장소는 내가 잡는 편인데 그날은 유독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요즘 한창 뜨는 마을 구석에 위치한 이 막걸리집은 특별하다. 작은 규모이지만 사장님의 철학과 애정이 듬뿍 담겨있기 때문인지 다양한 국내 유명 막걸리와 맛있는 안주를 즐길 수 있다. 최근 이곳저곳에서 유명세를 탄 덕분에 오후 5시 오픈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자리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곰팡이와 먼저 그곳으로 향했다.


이곳의 주문방식은 독특하다. 맘에 드는 안주를 고르고 이 안주와 몇 병의 막걸리를 마실지 사장님께 말씀드리면, 사장님은 그에 어울리는 국산 막걸리를 골라주신다. 이 곳의 막걸리들은 퀄리티가 좋다. 다음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화학성분이 들어가지 않고, 와인처럼 드라이한 녀석부터 바나나우유향이 나는 막걸리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나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 막걸리를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날 숙취도 없고 오히려 몸이 개운한 듯한 기분을 느낀 후 나는 이곳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곰팡이와 나는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느리게 그곳으로 갔다. 그 때문일까? 이미 자리는 만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신병자의 도착을 기다리며 가게 밖에서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신신병자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 카톡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삼단논법은 다음과 같았다.


1. 나는 오늘 두통이 심해 술을 마실수 없다.

2. 그러나 너희를 위해 운전을 해서 가고 있다.

3. 그러니 나의 은총을 찬양하라.


곰팡이는 짜증을 내며 그냥 돌아가라고 문자를 보내려 했다. 우리는 아쉬웠다. 내일은 가족과 보내기 때문에 사실상 2016년에 마지막 기분을 내는 날이었다. 그런데 많지도 않은 멤버 중 한 명이 술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평소 임꺽정이 일개 전투를 끝내고 술독을 들이키듯 술을 마시는 신신병자였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유독 아쉽고 아쉬웠다. 생각해보라. 술이 취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 취하는 것만큼 추한 것은 없다. 내가 얼큰하게 취해 형돈이가 되면, 대준이가 되어줄 곰팡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 정신 멀쩡한 사람이 우리를 지켜본다. 아 이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신신병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는 이미 많은 추억과 취기의 전공들을 함께 쌓았던 전우가 아닌가. 김보성 형님이 그렇게 외치시는데 우리도 '으~리'를 져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한가닥 치유의 희망으로 카모마일을 큰 것으로 사서 신신병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하얀 SUV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신신병자였다.




신신병자는 능숙하게 주차를 했고 우리는 아직 자리가 나지 않은 관계로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신신병자는 치료의 카모마일을 좋다고 연신 마셔댔다. 차량은 거의 시리아 내전 수준으로 엉망이었다. 수많은 회사 서류들과 계약문서들, 그리고 공부하는 서적들과 회사 물품들로 가득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뭉클한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다닐 때 그녀는 그저 어린 동생이었다. 당시에는 쌍꺼풀 수술도 하기 전이라 그저 순진한 외모의 학생이었는데, 이제는 꽤나 노련한 커리어우먼의 자태가 난다. 패왕별희 같던 그녀의 메이크업은 이제 외모마저 이뻐 보일 정도로 진화했다. 나는 스스로 늙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좀 더 세련되어졌다. 열심히 사는구나. 우리는 그녀를 그저 '신신병자' 취급하며 놀렸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녀는 열심히 사회적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창문을 똑똑이는 소리가 들렸다. 구수하게 생기신 사장님이었다.

"자리가 났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우리는 공수부대 낙하하듯 차에서 내려서 가게로 들어갔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두 가지 안주와 막걸리를 추천받고 술자리를 시작했다. 역시 예고대로 신신병자는 술을 먹지 않고 있었다. 술 대신 물을 마시는 모습이 정말이지 어색해 보였다. 물이 보드카처럼 보이는 환각마저 보이는 듯했다. 우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로의 근황 토크들, 옛 연애에 대한 비판들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객관적 평가 등 이제는 식상할만한 이야기들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신신병자는 비워지는 막걸리병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듯 여전히 물과 다량의 안주만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연애에 대한 푸념을 시작했다.

"난 딱 두 번 연애했잖아 평생. 근데 두 번 다 나중에 엄청 실망을 했어. 우연히 핸드폰을 보니까 다른 여자랑 엄청 문자를 보냈던 Nom도 있었고, 다른 Nom은 아예 바람까지 폈던 거야. 그래서 누굴 믿지를 못하겠어."

신신병자는 곰팡이와 비슷한 분류의 인간이었다. 남의 이야기는 다산 콜센터처럼 맞장구를 치며 들어주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크게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꽤나 많은 시간을 알아왔건만, 평생 2번의 연애를 하고 두 명 다 Bad Noms 였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계속 만남을 가지려 노력해야 해. 안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힘들어져."

나는 친동생 같은 신신병자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조언을 했다. 내 생각은 그랬다. 늘어가는 나이만큼이나 인간관계에서도 많은 변수와 생각들이 자라난다. 오히려 순수한 시기에 만났던 관계들은 시작이 편했던 것 같다. 서로 좋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신신병자에게 과거 몇 번의 소개팅을 해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인 중에는 내 여동생이 있다면 소개해 줄만한 남자들이 한 다섯 명 정도 있었다. 그 다섯 명 중 식상한 곰팡이를 제외하면 네 명이 남는다. 그중 2명을 소개해줬지만 그들은 추풍낙엽처럼 신신병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당시에는 그저 그녀의 눈이 높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의 대화에서 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새로운 사랑의 시작은 믿음에서 출발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아무리 괜찮아도 쉽게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다소 거리를 두고 적극적이지 않았던 그녀의 잘못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마음을 열고 누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소개팅과 다른 세계의 문제였다. 다소 술집의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눈치만큼은 CIA 수준인 곰팡이가 말을 시작했다.

"이거 신신병자도 한잔은 마셔야지. 차를 가져왔으니 신신병자 집에다 주차해놓고 근처 샤로수길로 갑시다."

신신병자의 나쁘지 않은 반응에 우리는 그렇게 차를 타고 이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차를 주차시킨 후 택시를 타고 샤로수길로 갔다. 역시나 요즘에 한창 핫한 이 곳에도 많은 청춘들이 떠돌듯 흥에 겨운 연말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자주 갔었던 홍합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다양한 맥주들을 취급하는데, 한때 양조사가 꿈이었던 내게는 백화점의 레고 코너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2차를 시작했다. 신신병자도 호가든 체리맛을 시키며 그동안의 절제에 대한 보상으로 크게 한 모금을 마시고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난 예전부터 남들보다 10%만 더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었어. 그러면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 일도 역시 그렇게 해. 외근이 많으니까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다니지만 매일 조금만 조금만 하다 보니까 어느새 인정받게 되더라고. 근데 그 시간 동안 일 외엔 별로 남은 게 없어. 용팔 오빠가 몇 명을 소개해줬지만 쉽게 마음이 안 가더라고. 나도 그분들이 괜찮은 사람인 거 알아. 근데 이제는 누구랑 만나는 것 자체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안나. 어떡하지 오빠들. 나 이제 31살이야."

우리도 모르는 사이 청춘은 그렇게 덧없이 흘러간다. 아주 조금씩 변하는 나와 주변을 우리는 의외로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익숙하지 않은 숫자가 우리의 나이라고 적혀있다. 때로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고 좋은 관계들을 쌓는다. 부모님께 효도도 하고 친구들과 여행도 떠난다. 그러나 가끔씩 무엇인가 허전한 마음으로 옆자리를 살펴볼 때, 아무도 없음에 다소 우울해진다. 무엇을 위해 달려왔나? 시간의 대부분을 씩씩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별일 없이 보내온다. 하지만 10%의 시간 속에 자리한 외로움과 고뇌를 나눌 사람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녀는 지금 그 공백에서 헤매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 몇 병씩의 맥주와 감자튀김 그리고 홍합 스튜를 먹었다. 쉴 새 없이 손님들이 오고 갔다. 연말의 즐거움과 한해의 아쉬움들은 나만 가진 느낌이 아니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우리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내리는 신신병자에게 나는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올해는 그 10%를 너를 위해 써. 이제 그래도 돼."

쓰러져 잠든 팡이를 뒤로 하고 내리는 신신병자는 묘한 웃음을 짓고 집으로 향했다. 내 친한 동생의 뒷모습이 쓸쓸한 밤이었다.



https://youtu.be/6UUjlkz8l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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