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생활에서 경험한 안 좋은 사례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 안에 탑승해있다. 그 기차는 절대 중간에 멈추지 않는다. 매력적인 10대와 20대의 정거장을 거쳐 최고점인 30대를 향하면서, 우리는 점차 내리막길을 경험한다. 올라갔을 때보다 체감상 빨라지는 기차의 속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인생이란 산을 한창 오르던 시기에 우리는 여러 외부의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부모님의 교육관, 대문호의 저서들, 친했던 형님들의 조언들 그리고 인생의 주변을 맴도는 여러 환경들이 그렇다. 그렇다면 30대가 되어가면서는 어떨까? 생각보다 기존에 쌓아놓은 가치관과 나도 모르게 생긴 아집들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무슨 책을 읽어도 비판적으로 해석하며, 나에게 훈계하는 부장님의 랩소디 동안 딴생각을 하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위로한다. 그렇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멋져지지 않는다. 남을 말을 들어먹지 않고 내가 살아온 인생으로부터의 경험들로 모든 세계의 기준들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40대가 되면 우리의 옛 모습 같은 젊은이들은 우리를 '꼰대'라 부르기 시작한다. 늙은 것도 서러운 마당에 꼰대까지 되어가는 것은 정말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해보았다. 회사생활에서 만났던 나의 상사에게 배우는 멋지게 늙기 위한 방법을.
(1) 할 말이 없다면 굳이 하지 않는다.
J 차장은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관심이 J 차장과 같았다면, 우리나라는 지금쯤 덴마크보다 행복한 나라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인공위성과 같다.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업무로 바쁜 우리들의 주위를 맴돈다. 그는 책상 위의 작은 변화나 패션에 대한 새로운 시도까지 정확하게 캐치해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 최주임, 오늘은 별다방에서 커피를 사 왔구먼. 역시 최주임은 부르주아야."
"이거 아침에 부장님이 사주신 건데요.."
"뭐야? 그럼 나는? 아니 왜 부장님이 나를 빼먹으셨지?"
나는 순간적으로 그날의 아침도 기분이 더티 해지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아, 출근길에 우연히 뵈었는데 커피 한잔 사주신다고 하셨어요."
J 차장의 눈알은 구글에 있다는 슈퍼컴퓨터처럼 빠르게 돌아간다. 굳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그냥 자리로 가면 될 텐데, 그는 다시 말을 잇는다.
"역시 부장님이 최주임을 유독 좋아한단 말이야. 그지? 이번에 고과도 잘 주셨고."
이렇게 나의 고과는 부서 내에 생중계로 모두 알려진다. 분명히 인사팀에서는 고과에 대한 평가와 피드백은 개인적인 대화로 해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왔건만, 그는 생각나는 대로 입이 뚫린 대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역시 사회생활은 최주임처럼 해야 해. 그래야 별다방 커피도 얻어먹는 거야. 그렇지? 김대리?"
운동권 출신의 완고한 김대리는 늘 그렇듯 썩소를 한번 날리고 대꾸하지 않는다. 나는 김대리를 존경한다.
"아니, 무슨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김대리."
다소 마음이 상한 J 차장은 애타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리고 김대리는 고개를 돌려 대답한다.
"결재 좀 빨리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틀째 기다리고 있어요. 차장님."
우리는 지금까지 굳이 아침에 필요하지 않은 그의 모닝와이드를 경험했다. 내 밑에 수많은 부하가 있어도 굳이 할 말이 없다면 하지 말자. 특히 본인의 위트가 평균 이하라면 말이다.
(2) 본인의 전설들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한 번은 목요일 저녁 회식자리였다. 부서원들 사이로 돌려지는 술잔들만큼 우리들은 모두 기분 좋은 취기를 갖기 시작한다. 그때 이 정도면 되었다는 듯이 J 차장의 연대기가 J 차장에 의해 낭독되기 시작한다.
"내가 말이야. 대리 때는 주말에도 매일 나왔어. 그때 내 딸이 2살이었는데 내가 집에 가서 안으려고 하면 울더라니까. 그렇게 일해야 일이 빨리 느는 거야. 최주임."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뭐 일을 못한다는 건지, 주말 내내 나오라는 건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J 차장은 나의 반응 따위는 관심이 없다는 둥 다음 챕터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윗사람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해.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걸 몰라. 보고서를 하나 내더라도 그가 원하는 걸 딱딱 표현해야지 맘에 들어하는 거야. 내가 예전엔 PPT로 쫘악 만든 다음에 아래에 팀장님이 읽으시게 스크립트를 모두 적어놨었어. 그러니까 아직도 팀장님 나를 좋아하시는 거라고."
실제로 팀장님은 J 차장을 좋아했다. 아니 다시 표현하면 J 차장을 자주 불렀다. 항상 파티션 넘어서 들려오는 'J 차장!'은 성당 종소리만큼이나 자주 들렸다. 가끔은 화면보호기를 바꿔달라는 팀장님의 요청에 적진을 뚫고 가는 람보 같은 그의 기세가 놀라운 적이 있었다. 화면보호기를 바꾸러 가는데 왜 저렇게 뛰어가야 하는 걸까? 아마도 무척 중요한 윈도우 화면보호기였을 것이다.
경력이 쌓여가면 당연히 수많은 경험들이 축적된다. 하지만 그 당시 없었던 사람들에게 동일한 공감대를 요구하거나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비효율에 가깝다. 본인의 레알 전설들은 스스로 간직해보자. 남들은 정말 레알 궁금하지 않다.
(3) 우리는 가족이 아니다.
한 번은 J 차장이 본인 파트의 부하 3명을 회의실로 불렀다. 영광스럽게도 그 안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다음 주 토요일에 부산지점과 회에 쐬주한잔 하러 가자. 다들 몇 시까지 서울역으로 와."
나를 제외한 두 명은 모두 가족이 있는 가장이었다. J 차장은 그들에게는 미리 재수씨들에게 양해를 구하라고 하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최주임은 여자 친구도 없고 그냥 무조건 와."
솔로인 것도 서러운 마당에 이제는 자유 행동권까지 박탈당한 나는 할 말 조차 잃었다. 우리는 그다음 주에 다정하게 KTX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기차 안은 J 차장의 디너쇼와 같았다. 나는 슬며시 이어폰을 끼며 자는 척을 했지만 그래도 그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2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주말에 오붓하게 부산지점 간부들과 회식을 했다. 횟집은 마침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중간에 잠깐 나와서 바라본 바다는 정말로 내 미래만큼이나 칠흑같이 어두웠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농익은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겨우 참고 다시 회식장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부산지점장님의 바라지 않은 호의였다.
"J는 나랑 대리 때 함께 도그 고생한 사이야. 이렇게 보낼 수 없어. 내가 좋은 호텔 잡아놨으니까 자고 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영화 <신세계>의 한 장면처럼 상을 엎어버리고 누구와 한판 붙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이 익숙해진 나는 지점장님 최고라는 말과 함께 호텔로 향했고 우리는 그날 같이 잠이 들었다. 정말 환상적인 아니 환장적인 밤이었다. 주말은 가족과 보내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 삶의 방향이다. 남의 주말을 가족인 듯 탐하지 말자. 제발 부탁한다.
(4) 너에게만 소통
한 번은 부서 내 면담을 실시하던 날이었다. 부하직원들의 고충이나 의견을 편하게 들어보자는 취지는 좋았다. 문제는 내 부서 멘토가 J 차장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J 차장은 나를 부르더니 말을 시작했다.
"최주임, 우리 식사를 하면서 면담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뭘 좋아하나?"
나는 매번 먹던 소주와 삼겹살이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더구나 '최주임이 고기를 잘 굽는다'는 사회적 미신까지 팽배해져 나는 매 회식마다 가게 직원 이상으로 고기를 구웠다. 소고기라도 먹는 날이면 고기가 탈까 봐 오가는 대화엔 참여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편한 면담이라는 생각에 소신대로 말해보았다.
"그럼 차장님, 돈가스 드시러 가실래요? 옆 빌딩에 맛집이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돈가스 별로 안 좋아해."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럼 설렁탕 드시러 가실까요?"
"아냐. 설렁탕은 국물이 많아. 배부르지나."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럼 네가 말하지 그러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또다시 사회생활은 계속되었고 다른 대답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우리 돼지갈비에 소주 한잔 하자 그럼. 이따 6시에 나갑시다."
그 날밤 우리 둘은 내가 연신 구워낸 돼지갈비와 소주 4병을 비웠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무튼 J 차장은 면담 결과보고서를 제출했고, 그 자료엔 '직원들의 업무 만족도가 높다'는 다른 회사 직원들의 면담 결과들이 적혀있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내가 극적 재미를 위해 '해태'처럼 상상 속 인간을 창조했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이것은 실제로 한 명의 상사로부터 나온 주옥같은 실화이다. 가끔은 나도 믿기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이런 분과 2년을 일했고 여전히 연락을 하고 잘 지내는지. 그러면서 어른들이 소주 한잔을 드시며 말씀하시던 그 말이 떠올랐다.
"니 인마,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
그렇다. 남의 돈을 버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런 어려움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나의 영혼은 20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우리는 그렇게 늙어가고 고집이 생기고 이상한 행동 패턴들을 가져가기 시작한다.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과거는 지금보다 소통이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한다. 세대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상사로서도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아마 40대가 되면 나도 C차장으로 부하직원의 브런치 속에 등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 번씩 스스로에게 다짐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제발 멋지게 늙어가자고 말이다. 내 생각이 아닌 모두가 생각하는 멋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