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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푸근 Jan 09. 2017

사랑에 대한 철없던 대화

알투디투의 노래




영화 <스타워즈>에서 쓰리피오(C3PO, 좌)와 알투디투(R2D2, 우)


대학에서 가장 행복했던 수업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취업이 확정된 이후의 수업들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대학 내내 나는 정말 맞지 않았던 전공과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1학년부터 Native들과의 경쟁에서 턱이 돌아간 듯 넉다운되었던 나는 전공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4학년 마지막 학기에도 이수해야 할 전공과목들이 꽤나 남아있었다. 하지만 취업이 된 이후에는 다소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고, 그렇게 나머지 전공과목 이수에 힘을 썼다. 나는 스타워즈 덕후로서 쓰리피오가 그려진 맨투맨티를 자주 입고 다녔는데, 덕분에 '쓰리피오 선배'라는 별명이 생겼고, 나와 함께 강의를 듣던 동기는 '내 옆에 있는 등치 큰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알투디투'가 되었다. 알투디투가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때문에 수업에 오지 않은 날, 나는 혼자서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때 지각을 한 누군가 닌자처럼 내 옆자리에 앉았다.

"쓰리피오 선배님, 저 책 좀 보여주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이름만 알고 있는 P라는 후배였다. 그녀는 편입을 하여 당시가 두 번째 학기였다. 하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P는 꽤나 결석이 많았다. 왜인지 모르게 그녀에게선 자유로운 영혼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책을 책상 가운데 옮겨 놓으며 말했다.

"뚜디뚜디. 여깄어요."

그 순간 P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빵 터져버렸다. 그렇다. 하찮은 농담을 한 것을 나였지만, 나는 다 큰 성인이 강의시간에 이렇게 대놓고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 덕분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그리고 교수님이 나를 보며 한마디를 하시기 시작했다.

"용! 아무리 취업을 했어도 수업은 제대로 들어야지. 그 후배까지 공부 못하게 방해하고 그러면 쓰나!"

나는 억울했다. 나의 타고난 개그 DNA라고 하기엔 내가 봐도 창피한 개그였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도 숨을 못 쉬는 듯 웃고 있었다. 나는 교수님께 죄송하다 말씀드리며 진땀을 흘렸다. 그것이 그녀와 친해지게 된 첫 계기였다.




알투디투의 결석이 많아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P와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함께 밥을 먹으며 그녀에게 평소 궁금하던 것을 물어봤다.

"근데 왜 그렇게 결석이나 지각이 많아? 집이 멀어?"

"아뇨, 전 책을 정말 좋아하는데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잘 몰라요. 덕분에 학점은 망할 거 같아요."

오랜만에 만난 진짜 대학생 같은 느낌의 후배였다. 대부분의 내 후배들은 1학년 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학점관리에 굉장히 집중했고 민감했다. 나는 그런 모습이 내심 안타깝기도 했다. 내가 신입생이던 시절만 하더라도 캠퍼스가 이렇게 무미건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의 1학년 때를 연상시키는 후배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P는 취업과 진로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다.

"그래도 요즘 취업이 힘들어서 관리를 해야 해. 너무 놓지 말라고."

나는 노인네 같이 잔소리를 하였지만 진심 어린 조언이기도 했다. 취업을 위해 면접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지만, 특히 나란 사람을 고용하라 주장하기엔 내가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P는 돈가스를 우적우적 씹으며 대답했다.

"쓰리피오 선배가 있으니 수업은 제때 나가볼게요. 사실 편입하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근데 알투디투 선배는 왜 안 나오세요?"

"아, 그 녀석 취업했다고 신나게 여자 친구랑 놀고 있어."

P는 연신 돈가스를 서걱서걱 썰으며 말했다.

"그럼 쓰리피오 선배는 연애 안 하고 뭐해요?"

"나? 나는 이렇게 그냥 혼자 놀고 있지."

그 순간 뿜어지는 돈가스의 조각들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고, 나는 순간적으로 이 만남이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불안감이 마음속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강의 중간의 쉬는 시간에 P는 다짜고짜 본인의 사랑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선배, 사랑이란 두 소설이 만나는 것과 같아요. 남녀는 완전 다른 내용으로 꽉 채워진 각각의 소설인데, 서로의 소설을 읽어나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모두가 서로의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정독할 수 있다면 그다음부터는 새로운 소설 한 개가 쓰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대부분의 연인들은 한 번의 정독이라도 해보지 못해요. 누군가는 몇 페이지만 읽고 다 알았다는 듯 책을 덮어버리죠. 어떤 사람은 내용을 곡해해서 이해하죠. 그리고는 상대를 다른 사람으로 이해해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나는 순간 가슴속에 싱크홀이 생긴 듯한 공감을 느꼈다. 나도 몇 번의 연애를 했었지만 자신 있게 누군가의 책을 끝까지 정독했다 말할 수는 없었다. 마치 치실을 쓰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혐오스러운 것처럼, 이전의 연애 속 나라는 주인공은 너무나도 철없고 부주의하며 속이 좁았다.

"그럼 누군가 너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공감해준 사람이 있었어?"

P는 희대의 썩소를 보이며 내게 말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스스로 정독한 줄 알죠. 실제로는 서평만 읽고 흉내 내는 거예요."

"남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아. 좋은 사람도 있을 거야."

"쓰리피오 선배는 그런 좋은 남자인가요?"

나 역시 희대의 썩소를 구현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양심상 아냐."

"역시 쓰리피오는 거짓말을 하진 않네요."

나는 그 순간 두 소설이 합해진다는 P의 멋진 말을 되새겼다.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독을 해야 할 시간들, 어떤 부분에 대한 의미를 서로 토론하는 순간들. 어느 순간부터 요즘의 연애에는 그런 것들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너무 진지해진 분위기를 바꾸려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방망이 깎던 노인과 바다.."

나의 혼잣말에 P는 황당하다는 표정과 함께 되물었다.

"뭐요?"

"두 소설이 합쳐지는 거 말이야.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어. 그래서 나온 게 '방망이 깎는 노인과 바다'야. 월척을 위해 험난한 항해를 하고 온 노인이 어부의 삶에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방망이를 깎기 시작하는 거지. 어때?"

P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선배, 어떻게 취직했어요?"




사랑을 소설에 비유한 P의 발언이 있고 나서, 우리는 꽤나 많이 사랑과 인연에 대한 개똥철학들을 토론했다. 한 번은 나와 P 그리고 알투디투가 함께 학교 앞 치킨집에서 열심히 치킨을 먹던 때였다. 평소 양념통닭을 좋아하는 알투디투는 입에 양념을 묻혀가며 치킨을 먹고 있었다. P는 그런 알투디투를 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알투디투가 많이 배가 고팠던 모양이에요. 주인이 밥을 잘 주지 않나요?"

"닥쳐."

알투디투는 단호한 답변으로 그녀의 개그를 방어했다. 그때였다. 치킨집에서 알투디투에게 낯익은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두 포크를 테이블에 놓아버렸다. 나는 그의 행동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왜요? 무슨 웃음이에요?"

P는 눈치를 채고 내게 물었고, 나는 알투디투의 동의를 구한 다음에 말을 시작했다.

"알투디투가 1학년 때 CC였거든.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그 여자분과 함께 붙어 다녔어. 그리고 평소 알투디투가 좋아하던 이 노래를 그렇게 자주 들었데. 그리고 한 1년 사귀고 헤어졌나? 그 직후에 이 녀석이 사랑니가 심하게 아파서 치과로 갔지. 엄청 더운 날이었어. 알투디투가 사랑니를 뽑고 나왔는데 엄청 얼굴이 붓기 시작하더니 미친 듯이 통증이 왔데. 그래도 참고 집에 가려고 길에 서있는데 이 노래를 듣게 된 거야. 주변 어느 가게에서 틀었던 거지. 신호등을 기다리는 그 순간에 말이야. 그때 알투디투는 미친 듯이 눈물이 났어. 당시에는 망할 사랑니를 뽑아서 아파서 눈물이 나는 거라 생각해버리고 말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거지. 이제 이 노래를 듣고도 함께 공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펐던 거야. 명곡이야. 특히 알투디투에게는 더 특별하지."

감성이 풍부한 P는 감동한 듯 양념치킨 한 조각을 그의 그릇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힘내요. 알투디투."

나는 당시 죄수에게 치킨을 배식하는 듯한 P의 모습이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알투디투는 그 이별 후 꽤나 시간이 지났던 당시에도 축 처진 어깨와 함께 다시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알투디투가 새로운 여자 친구를 만나러 떠난 후, 나와 P는 전철역까지 걸어갔다. P는 아까의 대화가 꽤나 기억에 남았는지 다시 말을 꺼냈다.

"알투디투 선배에게 그 노래는 평생 기억에 남는 노래가 되겠죠?"

"그렇지, 나름 멋진 일이야."

P는 자조 섞인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덕분에 아무 관련 없는 우리도 저 노래만 들으면 이 이야기가 떠오를 것 같아요. 어렵네요. 사랑이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철없던 대화 속에는 그 이후에도 벌어질 인연들과의 문제를 해결할 모든 단서들이 들어가 있었다.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대를 어떻게 알아가는지, 그리고 나를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하지만 거짓말처럼 새로운 연애가 시작되면 우리는 그 가르침들을 잊고 다시 실수를 반복한다. 이 대화 이후 5년 동안 아직도 내가 정독을 끝낸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나라는 책을 전부 읽지는 못한 것 같다. 남은 것이 있다면 순간의 추억들과 나와 관련 없는 이 노래뿐인 것만 같다.  




https://youtu.be/s0YaI__p-5s

알투디투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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