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당한 팩트 폭력
연말의 어느 날이었다. 12월에 이사를 한 우리의 새 집으로 친척들이 대거 방문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안겨서 잠자던 조카들이 이제는 집에서 EPL을 찍듯 뛰어다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는 9살이라는 나이에 조신하게 내 책상에서 책을 읽는 조카가 있다. 바로 서현이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조숙하여 정신연령이 30살은 된 듯한 느낌이다. 그 나이 또래에서 보이는 조르거나 운다던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차분히 사촌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반론을 제기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그런 서현이가 책을 읽다가 불현듯 내게 갑자기 질문을 했다.
"삼촌은 왜 결혼 안 해요?"
당황스러웠다. 이제는 9살짜리에게도 대략의 사정과 주변 정황을 말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나 스스로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대답하려 했다.
"그러게 말이야. 삼촌이 인기가 없나 봐."
"엄마가 그러는데 삼촌은 이쁜 여자를 안 좋아한다면서 제일 좋아한데요."
그것이 팩트 폭력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사실이 아니었다. 사촌 누나가 한창 소개를 주선했을 때는 소개팅이 거북스러워 자연스럽게 거절을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서현이에게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나는 나름 애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야. 가끔 너희 엄마는 재미를 위해 거짓말을 하셔. 삼촌은 이쁜 여자만 찾는 게 아냐."
"그럼 뭘 찾는데요?"
순간적으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국정조사특위도 아니고 지금 나에 대한 변론을 하는 상황이 싫어졌다. 그런데 문득 친척 누나가 이 조그만 아이에게 나에 대해 뭐라 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누나가 삼촌에 대해 뭐라고 해?"
서현이는 총기 가득한 눈빛과 무표정을 동반하여 대답했다.
"엄마는 삼촌이 김건모처럼 될 거래요."
나는 어릴 적 내 사촌누나를 참으로 좋아했다. 시원시원한 성격과 돌직구 같은 조언들은 사춘기 시절 나에게 사이다와 같았는데, 그 사이다가 이제는 독가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울적한 마음에 서현이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서현아, 네가 볼 때 삼촌 어떻니? 잘 생겼어?"
서현이는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흐흐 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며 수줍게 고백했다.
"아니요. 흐흐흐."
평소 편애 가득한 사랑을 보내던 조카였다. 그래서 그 비싸다는 레고도 생수 사듯이 사주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 같은 대답으로, 나는 '이제 레고는 없다'는 경제적 보복조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서현이는 나의 눈빛에서 슬픔을 느꼈는지 말을 이어갔다.
"근데 삼촌은 재밌어요. 여자들은 재밌는 남자 좋아해요."
"그렇지도 않아..."
나는 기운 빠진 대답과 함께 기분이 우울해졌다. 내 방 창문으로 보이는 저녁 하늘이 유독 아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서현이는 동그란 두 눈으로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새해가 지나 그 친척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서현이의 증언으로 인해 그녀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감정을 갖기 시작했고, 내 인생에서 가장 까칠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
하지만 친척 누나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을 시작했다.
"너 소개팅 하나 해."
나는 순간 Siri랑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밑도 끝도 없이 명령을 내리는 그녀로 인해 나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누군데?"
"아, 그건 알 거 없고 날 믿고 그냥 해. 번호 넘긴다."
과거 군사정권에 맞서 학생운동까지 했던 친척 누나는 본인이 증오했던 사람들처럼 내게 명령하듯 소개팅을 하사했다. 웃긴 건 나 자신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무례할 수 있냐며 화를 내야 할 텐데, 나는 소개팅에 대한 이 신선한 접근법이 맘에 들기 시작했다. 아는 것은 이름뿐이었다. 내 사진을 보내는 절차도 없었다. 무엇인가 동심의 만남 같다는 철없는 생각에 내심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카톡을 통해 연락을 하였고 약속 장소와 시간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소개팅 당일이 되었다. 나는 마침 미용실을 오픈한 친구가 있어 오전에 머리를 다듬으러 갔다. 평소 그루밍에 자신 없던 나는 중요한 날이 있으면 미용실에 들리곤 했는데, 그 날 역시 소개팅을 위해 나름의 부지런을 떨었다. 미용실은 오픈을 한지 얼마 안 되어서 정말 손님이 없었다. 친구는 머리를 다듬으며 내게 말했다.
"요즘은 약간 부스스한 스타일이 대세야. 너무 단정하면 아저씨 같으니까 좀 날리게 세팅 해줄게."
평소 미용실에서 묵언수행을 하는 듯 조용한 나는 별다른 요청도 불만도 없는 고객이었다. 그래서 친구의 말을 신뢰하고 경과를 지켜봤다. 하지만 20여분이 지난 후 거울을 본 나는 이건 아니라는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돌이 아니었다. 그런데 평범한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를 세팅하니 사회생활이 제 맘처럼 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친구에게 말했다.
"이거 좀 과한 거 아닌가. 어색한데. 내가 뮤직뱅크 나가는 것도 아니고.."
친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처음엔 다들 어색해하지. 하지만 이렇게 꾸며야 젊은 느낌인 거야. 네가 맨날 아저씨처럼 잘라서 그래."
사장의 발언을 교주의 지침처럼 듣고 끄덕이는 스태프들 덕분에 나는 묘하게 설득을 당했다. 그렇게 흩날리는 머리를 가지고 소개팅 장소로 갔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나는 스스로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가위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교통사고를 내고 나서 머리를 쥐어뜯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난 내 친구의 전문성을 믿어보기로 하며 더 이상 창문을 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10여분이 지나자 소개팅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머리를 한번 힐끗 보며 말했다.
"오늘 바람이 많이 불죠? 어서 들어갈까요?"
그날은 바람조차 없는 맑디 맑은 날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늘 그런 듯한 대화들과 식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우울한 기분으로 도배가 되고 있었다. 그냥 똑같은 느낌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뭔가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전에 깨닫곤 했던 '역시 난 소개팅과 안 맞는구나'라는 진리만 다시 되새기며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집에는 친척 누나와 서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척 누나는 꿔준 돈을 못 받은 채권자처럼 질문하기 시작했다.
"어때? 이쁘지? 괜찮지? 애도 착하다니까."
"응.."
친척 누나는 나의 반응에 미간을 찌푸리며 모든 것을 이해한 듯 말했다.
"너 또 그 느낌이 안 든다는 타령 하려고 그러지. 아 답답하다니까. 아니 한 번 보고 어떻게 느낌이 와. 자꾸 봐야지. 너 이러다 혼자 늙어 죽어."
마치 죽으라는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마음속이 더 답답해졌다. 그녀는 과거 던졌던 화염병을 투척하듯이 폭풍 비난을 계속했다.
"그리고 머리는 그게 뭐야. 네가 20 대니? 동방신기야? 아휴 내가 못살아 진짜."
나는 더 이상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온 세상을 비난하고 싶었다. 그리고 축 처진 어깨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서현이는 그런 나의 뒤를 졸졸 따라 들어왔다.
"삼촌, 울면 안 돼요."
"남자는 그렇게 쉽게 울지 않아. 서현아."
서현이는 무표정한 특유의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학원 선생님 엄청 이뻐요."
"아.... 제발 그만해.. 삼촌 그냥 혼자 살게. 혼자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왔어."
나는 이미 쥐어뜯은 듯한 머리를 다시 쥐어뜯으며 대답했다. 서현이는 이 상황이 안쓰러운 듯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제 어린아이에게 고민을 부여하는 상황까지 왔다는 생각에 서러움마저 느껴졌다. 서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내뱉었다.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나는 그날 밤 욱하는 마음으로 거실로 나가 부모님, 친척 누나라는 화상과 서현이 앞에서 2017년 소개팅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이제 앞으로 어떠한 제안도 하지 말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의 짧은 대국민담화가 있고 난 후 친척 누나와 서현이는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맥주 한 캔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불우이웃이 된 듯한 밤이었다. 나는 책상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익숙하지 않은 종이가 하나 보였다. 종이에는 서현이의 앙증맞은 글씨가 쓰여있었다.
'발레 선생님 010-XXXX-XX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