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의 사소한 그러나 진지한 변화들
여기 한 여성이 있다. 나와 사촌관계인 이 여성은 취업을 한 직후 몇몇의 연애와 만남을 갖었고, 그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였던 시간을 거쳐 이성에 대한 기준을 새로이 수립했다고 한다.
□ 그녀의 기준(업데이트가 수시로 발생함)
1. 키는 175cm 이상에서 본인(168cm) 보다 큰 것으로 조정
2. 직업은 본인과 비슷한 Pay grade의 직장을 원했으나 그보다 좀 작아도 OK인 것으로 조정
3. 과거 송중기를 좋아했지만 키스만 가능할 정도의 얼굴(객관적으로 설명 불가)로 조정
4. 대화가 통해야 하는 것은 조정이 불가(핵심가치라고 칭함)
나는 카페에 앉아 그녀의 업데이트된 기준을 듣고 질문을 시작했다.
"아니, 뭐 이렇게 조정이 많아?"
그녀는 노년층이 삶을 마감하기 직전의 한숨 같은 긴 한숨을 쉬고 내게 말했다.
"야, 남자 만나기가 쉽지가 않아. 나도 이제 나이가 먹는데 언제까지 옛 기준을 고수할 수는 없어."
내가 살아오면서 보았던 그녀는 정말 안정적인 인생을 살았다. 핵 부자는 아니지만 안정된 가정에서 자라오면서 남들 하는 것은 다 해보며 자랐을 것이다. 공부도 꽤 잘해서 누구나 아는 대학에 진학하고 마치 연결된 과정처럼 누구나 아는 직장에 취업했다. 그녀에게 인생의 브레이크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세상의 고민과 방황은 다해본 나와 상당한 직급 차이가 난다.
"내가 차장이라니까 자꾸 사람들이 내가 무슨 30대 후반인 줄 알아. 그리고 솔로라고 하면 그때부터 불우이웃 보듯이 시선을 바꾸고 갑자기 카톡 목록을 확인하며 소개해줄 남자들을 찾아. 아 정말 진절머리가 나."
한 때 인심이 후하신 우리 아버지가 성유리를 좀 닮았다는 찬사까지 보냈던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의 표정에는 성유리는커녕 시장에서 바가지를 쓴 전원주 선생님의 인상만이 남은 듯했다.
"그래서 원하는 남자의 조건이 도대체 뭐야? 그 4가지만 맞으면 돼?"
"몰라, 생각보다 저 하향된 조건을 충족하기도 쉽지 않아. 내가 많은 것을 바라는 건가? 좀 맘에 들면 또 상대방은 반응이 쉬원찮아."
나는 마음속으로 그 남자의 조건도 꽤나 쉽지 않았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조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침 대기업의 전략팀에 근무하는 그녀는 주 업무가 PPT 만들기임에도 불구하고 해보지도 않았던 전략을 짜고 있었다. 이성에 대한 그녀의 전략. 그것은 특수부대의 그 어떤 미션보다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녀는 다소 상승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조각 케이크를 시켰다. 우아한 동작으로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생크림을 발라 먹는 모습이 나름 엘레강스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우물우물 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엄마는 요즘 선이라는 걸 보라고 하는데, 가끔 내가 그렇게 늙었나 싶어. 내가 자산관리사 만났던 이야기 했어?"
그것은 작년 언젠가 였다.
[작년 언젠가, 모 레스토랑]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차장의 품격을 장착한 내 사촌은 언제나 당당하게 그리고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다소 피곤해 보였던 자산관리사는 나름 구겨진 인상을 펴서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녀는 그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은 한창 일할 나이의 결과물로서 수긍이 가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남자는 처음에 직장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강남의 어느 지역에서 자산관리를 하는 그는 관리하는 고객이 꽤나 많았다. 그녀는 이런 부분에서 능력이 있는가 보구나 하는 호감 +1을 날렸다고 한다. 문제는 디저트를 먹는 순간까지 직장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현시대의 자산 관리론에 대해 배우던 나의 사촌은 국제경제까지 이야기가 확장되자 화제를 전환하고 싶었다. 똑 부러진 그녀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했다.
"뭐, 평소에 하시는 취미 같은 것은 있으세요?"
"네, 저는 쉬는 날에는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테니스 모임에 나가는데요."
그녀는 드디어 경제학 수업이 끝났다 확신하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 테니스 모임에서 유명 패션업체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자산이 대부분 부동산이라.."
그렇게 그의 자산 관리론은 다시 풍월을 읊조리는 강아지처럼 중구난방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어느 순간 대화를 포기하고 일요일인 내일 뭐할까는 생각했다고 한다. 이미 호감도 -2000을 날려버린 순간이었다. 그것은 복구될 수 없는 점수였다.
"아니, 내가 자신 관리하러 지를 만났냐고. 나중엔 나보고 얼마 모았냐고 한번 상담해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 다시 생각해봐도 일에 미친 건지. 아 화가 나."
무척 순화시킨 그녀의 말에는 분노가 아직도 가득해 보였다. 나는 무슨 위로라도 해야 할까 싶었다.
"그래도 능력은 뛰어난 사람이었겠네. 남자는 능력도 중요한 거야."
"야, 그럼 네가 만나. 돈은 나도 벌어. 아니 무슨 선보러 나와서 상담을 하냐고."
폼페이 화산이 또 터진듯한 그녀의 분노는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나의 소개로 그녀가 만났던 소개팅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떻게든 진화를 하려 했지만, 나는 불난 집에 등유를 뿌린 듯한 후폭풍을 겪었다.
나는 여동생이 없다. 그런데 만약 있다고 가정하고 친구를 소개해준다고 할 때 후보군이 얼마나 나오나 고민한 적이 있다. 나름 초중고, 대학교, 군대, 직장에서 수많은 남정네들과 친해졌건만, 내 손가락은 단 4개만 접혔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동생이 아닌가. 기준은 높아졌고 내가 알고 있는 행실도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나는 내 사촌에게 그 접혔던 네 손가락 중의 한 명을 소개해줬다. 그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친구였다. 굉장히 예의 바르고 성격이 온순한 점이 큰 장점이었다. 가끔 형사 콜롬보처럼 옷을 입어 나를 당황시켰지만, 패션은 고칠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구나 훈남에 군살까지 없는 다부진 체격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내 사촌이 맘에 들어할 것을. 나는 집문서를 걸듯이 그녀에게 이 소개팅을 확신시켰다. 그렇게 그 둘은 만났다.
[또 언젠가, 모 레스토랑]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유려하지는 않지만 반응이 좋은 방청객형 대화능력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위트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사촌은 식사 후 집에 가면서 다시 만나자는 그의 카톡을 받고 내심 기뻤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4번을 만났다. 철이 지난 <내 이름은 김삼순>을 찍듯 그들은 남산에 놀러 가고, 점점 카톡의 대화들이 많아졌다. 나의 숙모께서는 친히 내게 전화를 걸어서 나의 공로를 치하하셨다. 본인이 가장 아끼는 조카라는 다소 수긍가지 않는 극찬을 쏟아내셨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서 나는 소개팅남에게 전화를 받았다.
"형, 저.. 할 말이 있습니다."
온갖 수심이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다소 불안해졌다. 하지만 빨리 확인을 해야 했다.
"어, 무슨 일인데?"
"저 소개해주신 분이 너무 잘 맞고 좋았는데, 저.. 헤어진 여자 친구가 연락이 와서요. 다시 잘 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그 순간 두 눈을 감았다. 거의 완성된 그림에 된장을 쏟은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침착하려 했다.
"그래.. 한번 헤어졌어도 다시 만나고 싶은 거구나?"
나는 한가닥 희망을 갖고 질문했다. 한번 헤어진 커플은 위험성이 크다는 보편적 인식을 은연중으로 주입하고 싶었다.
"네, 결혼하려고 합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거든요."
나는 그녀가 좋은 사람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머리 속에는 크게 공을 치하하셨던 숙모와 부하직원들이 무서워한다는 내 사촌만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만나라고 위협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 내 사촌에게는 빨리 잘 말하도록 해."
"예, 형 죄송합니다. 결혼식 때 사회 꼭 해주세요."
나는 순간 '사회 같은 소리하고 있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늘 사람 좋은 코스프레로 알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야, 좋은 사람이라도 누굴 못 잊는다는지, 그런 건 좀 파악해서 소개해줘야 할 거 아냐."
순간 사촌과의 대화는 청문회처럼 기류가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관심법이 특기인 궁예도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녀의 눈빛은 증오를 넘어 혐오까지 다다르는 듯했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내 기준도 바뀌었어. 그냥 잘 통하고 거부감 없고 그러면 좋겠어. 그리고 하나 더, 너한테는 소개는 안 받을 거야."
그녀의 주선자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것을 확인한 것으로 그녀의 분노는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나는 나름의 조언 아닌 조언을 해주려 했다.
"너무 조건을 만들면서 전략을 짜지 말고 천천히 기다려봐. 막상 그런 것이 맞는다고 해도 안될 인연은 어떻게든 안 되는 거래. 이러다 불현듯 나타날 거야."
그녀는 마지막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말은 여러 사람들이 물어보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지, 크게 바라는 게 많은 게 아냐. 그냥 믿고 기댈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조건들은 소개를 위해 맞춘 거지, 내가 바라는 이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냐. Understand?"
나는 사실 그게 무슨 말인지 느낌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나지막하게 웃어넘겼다. 그녀는 그런 썩소를 보며 내게 물었다.
"그럼 너는 뭐를 그렇게 보는 건데?"
나는 나름 진지하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고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조건이란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내 사촌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너나 나나 이대로 실버타운 가면 되겠다. 사촌아. 집에 가자."
소개를 해주고 싶다는 우리들의 호인들은 소개에 앞서 다소의 조건을 물어본다. 생각보다 우리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지만 뭐라도 말해야 하는 의무감에 사로 잡힌다. 그래서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키나 외모 그리고 성격에 대해 구술하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모든 것을 충족한 사람은 드물고, 생각보다 몇 가지 부족해도 괜찮은 사람도 만나게 된다. 가끔은 이같이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조건들은 만남이라는 것을 제한하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우리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 기준들로 어려운 만남을 갖고 더 큰 실망을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 언젠가 내 사촌은 최근 들어 자신의 조건들을 업데이트했다며 통보해왔다.
□ 그녀의 조건(최신 버전)
1. 주선자의 신뢰도만 확인하면 OK. (당연히 글쓴이는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