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푸근 Jan 23. 2017

지워지지 않는 1에 대하여

잔인한 우리의 거절 방식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내 핸드폰이 연신 카톡 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잠결에도 누가 문자를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핸드폰을 찾았다. 그리고 뻔하디 뻔한 그의 문자를 본다.

'브로,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1이 없어지지 않아.'

내 친구는 사랑에 빠졌다. 흔한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에게 그는 '인생의 만남'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렇게 두 번의 식사가 지나가고 그녀의 문자는 어느 순간 뜸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30대라는 나이라면 웬만하면 이 은유적 의미를 알 수 있다. 보낸 카톡의 답장은 마치 등기로 보낸 듯이 다음날 돌아온다. 대화가 겨우 이어져도 금방 끝나버리는 의미 없는 말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친구는 그것을 해석하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발명했다는 고도의 암호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불쌍한 중생은 지속적으로 희망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통일보다도 강한 염원에 가까웠다.




카톡은 대한민국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최고의 소통창구이다. 그러나 가끔은 놀랄 만큼 잔인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한 번은 회사 팀원들로 이루어진 단체 대화방이 있었다. 사실 말이 대화방이지, 이곳은 팀장님의 디너쇼 같은 느낌으로 진행되었다. 주말마다 날아오는 그의 지시들, 가족들과의 즐거운 추억을 공유해주려는 의미 없는 친절들, 그리고 문득 어느 음악을 듣고 감상에 빠져 유튜브 동영상을 보내는 등의 촌극이 벌어지곤 했다. 재밌는 것은 여기서도 사회생활의 레벨이 보인다는 것이다. 팀장님의 오른팔인 차장님은 이 시대 최고의 방청객이다. 팀장님이 방귀를 뀌어도 리듬을 맞춰 자신의 방귀로 대응할 듯한 그의 반응들은 우리를 항상 놀랍게 한다. 그 반면에 운동권 출신의 김대리는 평소 이런 대화창을 혐오한다. 그래서 아무런 말이 없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와 같다. 가끔은 팀장님이 김대리의 안부를 묻는 카톡을 남겨도 김대리는 응답이 없다. 그들의 이 같은 소통방식은 우리의 소중한 안주거리로 다가오곤 한다.


사실 이렇게 회사생활만 보더라도 카톡이라는 놈은 자비가 없다. 소통의 도구이지만 소통은 너나 하라는 듯한 표현들이 은유적으로 나타난다. 그럼 사랑에 대한 카톡은 어떨까? 다들 짐작했겠지만 더욱더 심하게 잔인하며,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그것은 지난겨울 언젠가였다.


내 친구 개미핥기는 예전부터 키가 큰 여성을 좋아했다. 본인이 작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소개팅을 해준다고 하면 항상 상대방의 키를 물어봤다. 그래서 친구들은 가끔 농구선수 정은순(185cm, 여자농구의 전설)이 그의 이상형일 거라고 놀리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175cm라는 모델스러운 여성과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정말 모델 같았다. 패션도 다소 파격적이라 파리에서 쇼를 마치고 돌아온 듯한 포즈로 그에게 다가갔다. 개미핥기는 갑자기 오버를 하며 평소 가지도 않던 고급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그만의 벨을 울리기 시작했다. 샴페인을 한병 시키고 평소 먹지도 않던 코스 메뉴까지 고집스럽게 주문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드디어 내 인생의 반려자를 찾은 것 같아.'

나는 그에게 수없이 이 문자를 받아오곤 했다. 그래서 귀찮은 나머지 평소와 같은 대응으로 답장을 했다.

'ㅗㅗㅗㅗㅗㅗㅗㅗㅗ'

하지만 그는 특유의 고집스러움으로 다시 카톡을 보내왔다.

'진짜야. 키도 크고 성격이 시원시원해.'

그 때문일까? 그녀는 시원시원하게 카톡을 씹기 시작했다. 개미핥기는 한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냐며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심성이 착했던 나는 그럴 수도 있다며 그를 위로했지만 그가 보낸 카톡의 1은 지독하게도 없어지지 않았다. 참다못한 개미핥기는 지구를 구할 기세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뵈었던 개미핥기(가칭)입니다."

"네."

Siri와 대화를 해도 이보다는 길게 답변이 오건만 그녀에게 자비는 없었다. 개미핥기는 그래도 눈치 없이 인생의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갔다.

"연락이 잘 안돼서 걱정을 했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음.. 연락을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죄송해요."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한동안 개미핥기는 길에서 충격으로 인해 멍하니 서있었다.


사랑은 서로가 소통하고 마음을 열면 그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그러나 일방적일 경우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본인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상대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작용했을 것이다. 외모가 싫다던지, 내가 싫어하던 학생주임과 닮았다던지, 그냥 싫다던지, 경우의 수는 무한대에 가깝다.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맘에 들었던 상대를 위해 다시 태어날 수도 없다. 가끔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나왔던 속담을 과신하며 도전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10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속담이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카톡을 등에 엎은 요즘의 나무들은 티타늄으로 만들어졌는지 잘 넘어가지 않는다. 잘못하다가는 도끼날 나가고 손목 다치고 그렇게 개미핥기처럼 울기도 한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현대의 사랑은 그만큼 잔인해졌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떤 방식이었을까? 핸드폰과 인터넷이 내 몸처럼 따라다니는 요즘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좀 더 아날로그의 감성이 가득했다. 당시에는 어떠한 연락을 하던 다소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했다. 한 때 시대의 사기극이라 칭했던 다음 영화를 보자.


하루동안 참 많은 것을 함께한 그들


그들은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불같은 하루를 보내고 다시 만나길 기원했다. 핸드폰이 없던 당시에 몇 달 뒤 비엔나 어디에서 보자는 것이 약속의 전부이다. 그들은 기다렸다. 다시 만날 그 날을 위해. 물론 이 영화로 인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랑꾼들이 유럽 열차를 탔다. 하지만 기차 안은 냉혹한 현실만이 가득했다. 밤새 트래쉬 토크를 하던 유럽 남정네를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열차 안은 실버타운처럼 인자하신 노년층으로 가득했다. 난 나름 아르바이트를 하며 세 번의 유럽여행을 갔는데 정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기억하는가? 이들은 정말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대화를 했다. 아마 친한 친구라도 이렇게 대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친구 곰팡이였다면 이제 알겠으니 좀 자라는 협박을 했을 것 같다. 그만큼 그들은 서로를 많이 알아가게 되었다. 서로의 가치관과 생각들을 공유했다. 요즘의 만남에는 이런 시간까지 지워지지 않는 1의 장벽을 넘어야 하는 숙제가 있다. 짧은 순간 나를 표현하고, 짧은 순간에 그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은 잔인한 카톡이란 녀석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왠지 슬픈 일이다. 우리는 그만큼 여유가 없어졌다. 만남에도 대화에도 사랑에도 조급한 결정이 필요해졌다. 카톡으로 표현해야 할 용단의 순간들이 많아졌다. 가끔은 아날로그식으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놈의 1이 없어지건 말던 말이다.




마케팅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한번 또는 두 번 주어진 시간 동안 자신을 어필해야 한다. '어머 나와 비슷한 점이 참 많으시네요'를 듣기 위해 공통점을 향해 질주해야 한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홍보의 달인들이 사랑에 성공하고, 다소 표현이 서툰 사람들은 마케팅의 실패를 지워지지 않는 1로 느껴간다. 잔인한 세상. 될 대로 돼라 하며 글을 마치고 싶지만 늘 그렇듯 긍정을 잠깐 담아보고자 한다.


요즘 한 동영상이 Youtube에서 화제가 되었다. 주인공은 각각 다른 장소로 가서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한다. 예를 들자면 피자가게에 가서 피자를 별 모양으로 구워줄 수 있겠냐는 뭐 이런 병맛 같은 요청들이다. 물론 상대방은 대부분 다양한 방식으로 거절을 한다. 그는 그렇게 수십 번의 거절을 경험하면서 질문하고 요청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생각보다 거절을 무척 두려워한다. 흔한 서양의 영화들처럼 자유롭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을 정말 못한다. (물론 시대가 바뀔수록 나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랑에 대한 거절도 두려워한다. 1이 없어지지 않는다며 친구를 불러 과음을 한다. 괜한 욕지거리로 상대를 탄핵하듯 비난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본인이 느낌이 안 온다고 한다. 상대의 결정을 존중해줘야 한다. 그럴 수 있다. 본인은 잊어먹었겠지만 본인도 지금껏 숱하게 거절을 해오고 살았다. 나의 인연을 찾아가는 과정을 좀 더 즐겨보자. 그렇게 쉽게 나타났더라면 알랭 드 보통을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은 지금쯤 밥을 굶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여유를 갖자.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1을 선택한 상대에게 말해보자.

"우리 언젠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봅시다. 반가웠소. 이 사람아."



https://youtu.be/LZEkqpuR1hE

영국산 사이다로 위로를 보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감이라는 시작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