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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씽킹 Oct 13. 2021

공부는 하지 않지만 시험기간입니다

독일학교의 시험과 성적

"아 맞다, 오늘 영어 시험 있구나!"

등교 10분 전, 가방을 챙기던 아이가 '쏘 쿨'하게 말했습니다. '시험'이란 단어에 귀가 번쩍 뜨인 나는 물었죠.

"어떡해? 잊어버렸던 거야? 준비는 했어?"

나는 말이 입에서 바쁘게 나가는데, 여전히 아이는 쿨합니다. 

"무슨 준비? 학교에서 다 배운 거잖아. 그냥 보면 돼."

지난주 독일어 시험과 수학 시험을 앞두고 전날 미리 공부하던 모습을 본 기억을 꺼내봅니다. 

"그때 독일어랑 수학시험 볼 때는 미리 공부했던 것 같은데? 영어는 할 게 없는 거야?"

"그건 수학 시험이 이진법의 덧셈, 뺄셈, 곱셈이었는데 그중에서 뺄셈이 좀 헷갈려서 미리 몇 개 해본 거였어. 독일어는 어휘가 아직 어려워서 찾아본 거고. 영어는 몇 개 까다로운 게 있긴 한데 괜찮아, 알아!"

자신감이 넘치더라고요.  그래도 긴장을 전혀 안 한 건 아니었는지 차에서 내리면서 "나 영어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줘!"라고 하더군요. 

그날 하교와 동시에 나는 시험부터 물었죠.

"아침에 네가 부탁한 대로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어땠어? 기도가 통한 거야?"

"괜찮았어. 그런데 다 맞지는 않았을 거야. 정답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는 문제가 두세 개 있었거든."

묻는 사람 민망하게 일관되게 쿨한 태도라니.

"뭐야,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난 또 당연히 다 맞는 줄 알았네."

"엄마, 88점(만점) 중에서 몇 점 잃는다고 큰 문제 아니야."

중학교 과정을 시작하고 첫 번째로 보는 시험이 2주째 계속되고 있는데도 딱히 스트레스라곤 없는 것 같은 아이가 신기해 물었습니다. '시험 기간인데 왜 공부를 안 하니?'란 말을 돌려서 묻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계속 시험 기간인데 너는 시험이나 결과에 대한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거 같아. 엄마는 중고등학교 때 시험 기간이면 스트레스 많이 받았거든. 준비를 철저히 못하고 시험을 보게 되면 더 그랬고. 넌 어때?"

"걱정되는 과목이 없는 건 아닌데 스트레스는 별로 없어.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면 되니까. 그리고 큰 문제가 없는 한 1이나 2가 나올 거야. 또 3이 나오면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마지막 문장은 보통 부모들이 아이를 격려하거나 위로할 때 쓰는 말 아닌가요. '괜찮아,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모든 과목에서 '1'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아이 스스로 자신에게 그렇게 관대한 성적 기준을 세우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뭐, 어쨌든 시험 스트레스는 없단 거니까 좋은 거죠.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보셨다시피 아이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시험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10월 들어서자마자 시작돼 앞으로도 2주 정도 더 진행될 예정이죠. 그러니까 10월 한 달은 거의 시험 기간인 셈입니다. 

한 달 내내 시험기간이라고 하면 어마 무시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건 일주일에 최대 두 과목까지만 시험을 볼 수 있는 독일학교의 규칙 때문이에요. 뿐만 아니라 꼴랑 두 과목인데도 불구하고 날짜를 연달아서 시험 보는 것도 안 됩니다. '월 화', '화 수', 이런 식으론 안 되고 '월 수', '월 목', '화 목'처럼 적어도 하루 이상의 간격을 두어야 하는 것이죠.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느냐 하면, 시간표 배치상 어쩔 수 없이 요일이 붙어있는 과목의 경우에는 아예 다른 주에 시험을 보도록 배치하거나 아니면 수업 시간을 임시로 바꿔서라도 반드시 하루 이상의 간격을 유지하고 시험을 봅니다. 우리 집 아이의 경우도 다음 주 지리와 음악 시험이 예정돼 있는데 시간이 화요일과 수요일로 붙어 있어서 다음 주만 지리 수업을 월요일로 옮겼다고 하더라고요. 

'일주일에 최대 두 과목, 하루 이상의 간격 유지'라는 이 규칙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어요. 대체로 부모님 입장에서는 공부할 시간이 확보돼 좋아할 수 있고, 한 달 내내 시험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끔찍한 규칙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공부를 하든 안 하든 시험 기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이 스트레스는 엄청날 테니까요. 

독일 학교가 이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이유는 정 반대입니다. 시험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죠. 일주일에 많아야 두 과목 시험 보는 데도 과목 당 시험 시간은 10~20분밖에 되지 않아요. 한 과목 수업 시간이 45분이라고 해서 45분 동안 시험을 보는 건 아니란 뜻이죠. 말이 한 달 내내 시험이지 아이들은 그 한 달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한국 아이들이 시험 기간 겪는 극도의 스트레스도 있을 리 없고요. 

시험 기간에 관한 규칙은 아니지만 하나 더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요인이 있다면 바로 과목에 따라 '수준별' 시험을 치른다는 거예요. 전 과목이 그렇지는 않은데 일부 주요 과목의 경우 수준에 따른 그룹별 수업을 하고 시험도 해당 그룹 수준에 맞게 치르게 되는 거죠. 


여러 장치를 통해 시험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점수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점수(Note)는 최고 1에서 최저 6까지 매겨지는데 각 점수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어서 꼭 6단계라고 할 수는 없어요. 1보다 잘하면 '1+'가 되고 3보다 못하면 '3-'가 되는 식이죠. 그러나 시험 점수가 학기 말에 받는 성적표의 절대적 기준은 아니에요. 시험 점수는 오히려 40% 정도만 반영되고 나머지 60%는 평소 수업에 참여하는 태도와 발표, 숙제 제출 등으로 평가하죠. 

이렇게 하는 데는 독일 교육 현장의 중요한 가치인 '교육은 학교가 책임지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다고 보면 됩니다. 학교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숙제를 성실하게 하면 따로 공부하거나 사교육 받을 필요 없이 누구나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숙제를 많이 주는 것도 아니에요. 독일은 아이들이 집에서 숙제를 하는 시간도 나이별, 학년별로 제한을 두는 '학교에 관한 법률'이 있을 정도로 공부에만 '매몰'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과정은 30~45분 정도, 중학교 과정인 5학년~7학년은 최대 1시간 정도가 보편적 수준이에요. 아이가 4학년일 때 담임 선생님은 심지어 "숙제를 하다가 30분이 넘어가면 그만해도 된다"라고 말씀하셨을 정도죠.  

심지어 그나마도 학교 밖으로 숙제를 가지고 나가지 않을 수 있게 방과 후 선택 수업에 별도로 '숙제' 클래스가 있기도 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 이 클래스를 선택하는데 그러다 보니 집에 가서는 숙제를 할 필요가 없어져요. 숙제(homework)는 있지만 '홈'에서 하지 않는 거죠. 


물론 독일 교육의 글로벌 경쟁력은 국가별 성취도만 놓고 봤을 때 한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게 사실이에요. 독일 내에서도 '너무 널널한' 교육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고 별도 사교육을 시키는 교육열 높은 부모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죠.  

하지만 적어도 시험이란 단어가 그 자체로 압박이나 극도의 긴장 혹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란 것만큼은 좋아 보여요. 너무 마음을 놓은 나머지 시험 일정 자체를 잊어버리기도 하는 아이를 보고 어쩔 수 없이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한국 엄마'인 나지만, 그래도 아이가 제가 매번 겪었던 시험의 압박을 느끼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해야 하는 공부를, 그 과정에서 늘 겪어야 할 시험이 유년기, 그리고 청소년기를 갉아먹는 괴로운 존재로만 인식된다면 너무 불행한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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