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말, 유튜브 채널 <육퇴한 밤>에 출연하는 영광스런 기회를 얻었습니다. '작지만 확실한 육아 동지가 되고자' 하는 취지로 개설, 운영되고 있는 <육퇴한 밤>은 오은영 박사님을 비롯해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쟁쟁한 육아/교육 전문가들이 다녀가신 곳이죠.
독자분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내용은 무엇일까, 오래 고민했고 준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방송 카메라 앞에 서 본 경험이 없는 제가 처음으로 녹화를 위해 스튜디오에 앉으니 마음먹은 만큼 쉽지 않더라고요. 긴장감을 숨기고 준비한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는데...
방송이 업로드되고 아쉬웠던 점들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어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두 가지는, 첫째 준비했던 내용을 다 쏟아내지 못했다는 것, 둘째 1시간 여 동안 진행된 녹화 분량이 20분 정도로 편집이 되다 보니 독자 여러분들에게 충분히 전달이 됐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엄마표 토론'에 있어서는 마인드셋과 실전, 이 두 가지가 핵심 축을 이루는데 뭐랄까 이도 저도 제대로 말씀을 못 드린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방송을 보면서 진하게 남더라고요.
해서, 아쉬운 대로 어나더씽킹랩 독자 여러분들에게 방송에 담기지 못했던 내용들을 몇 가지 짧게 공개할까 합니다. (*어떤 질문은 방송 내용 답변에 추가했고 방송에서 잘 설명된 어떤 질문들은 빠져 있습니다.)
2017년부터 아이가 1학년 입학해서 4학년 1학기 중반까지 독일에 살았어요. 아이의 언어 환경이 급격히 바뀌면서 한글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됐죠. 선배 맘들이 '영어가 들어온 만큼 한글이 빠져나간다'라고 했던 말들도 생각나면서요. 당시 아이가 우리말을 쓰는 상대는 엄마 아빠 정도였고, 그래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더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정적 계기도 있어요. 친한 한인 가족이 집에 놀러 왔을 때였는데 당시 의대 진학을 앞둔 그 집 큰아들과 아이의 아버지가 갑자기 토론을 벌이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유럽 사회에서 논쟁거리였던 이슬람 여성의 '부르카 착용'에 관한 문제였는데 저러다 밥상 뒤엎고 싸우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치열했어요. 나중에 그 집 아들에게 물어보니 집에서 늘 있는 풍경이고 심지어 다른 독일인 친구들의 집에서는 그보다 더 치열한 토론이 매일 벌어진다고 하더군요. 독일에선 도대체 토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지 궁금해서 찾아보고 공부하고 인터뷰를 하게 됐고요, 그 과정에서 토론식 교육을 하는 많은 나라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토론을 습관화하고 일상화한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토론이 공부나 학습이 아니라 문화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렇게 일상에서 수시로 경험을 쌓았기 때문인 거죠.
그 일을 계기로 토론 교육에 더 확신을 갖게 됐고 우리 집에도 토론 문화를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된 겁니다.
토론을 경험하고 자란 세대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토론 교육에 대한 관심이 급물살을 타고 실제로 교육 제도 등이 토론과 논술 중심으로 개혁하는 분위기로 가다 보니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합니다. 토론에 대해 잘 모르는데 그동안 우리가 봐왔던 토론은 전문가들의 영역이니 가장 먼저 사교육을 생각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토론은 생각하는 영역의 활동입니다. 그 고유한 부분이 학원에서 사교육에서 가능할까요. 한 가지 더 걱정하는 건 사교육 현장에선 아이들 개개인을 고려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개개인의 흥미와 관심, 재미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결과를 내야 하니 경쟁이라는 구도가 끼어들죠. 엄마들이 갖는 '토론은 어렵다'는 인식을 그렇게 대물림하게 되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저는 아이가 9살일 때 시작했어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학습이 아니라 놀이로 재밌게 접근하고 제안했기 때문에 당연히 잘 받아들였고요. 여기서 한 가지 드릴 팁은, 아이가 토론의 '토'자도 모를 때, 아예 그 개념 자체가 없을 때 '토론'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은 채로 일찍 시작하시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나중에 아이가 '아 내가 토론을 하고 있었구나'하는 자각이 들면 토론을 더 만만하고 쉽게 생각하게 될 거예요.
특정 주제를 가지고 하는 수업 형태의 토론은 3학년 이상이 적합하긴 합니다. 왜냐하면 주제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고 상대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는 태도도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주제 토론 이전에는 반드시 대화와 질문으로서 토론 기본기가 깔려 있어야 하고, 그건 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토론 상황에 물드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토론은 이런 것'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주는 기우에서 비롯된 걱정입니다. 토론 논제가 반드시 어려워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입 면접이나 논술 시험 대비용 시사 상식을 어린아이를 상대로 다룰 수는 없는 거잖아요.
또 하나 주제는 보통 엄마가 고르기 때문에 엄마도 이해 안 되는 토픽을 고를 리는 없겠죠. 엄마부터 관심 있는 것, 흥미로운 것, 한 번쯤 대화해보고 싶은 주제로 접근하시면 됩니다. 이게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엄마가 공부로 생각하고 지루해하고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표정을 보이면 아이가 바로 안다는 겁니다. 아이의 관심과 흥미도 중요하지만 엄마도 즐거워야만 토론은 지속가능해지고 일상이자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중간에 모르는 내용이 튀어나오면 함께 찾아보면 됩니다. '엄마가 모르는 내용이네' 혹은 '엄마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고 인정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자료를 찾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요즘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까지 되기 때문에 오히려 장점이 됩니다.
엄마는 왜 모든 것을 알아야 할까요. 외국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정말 많이 쓰는 표현 중 하나가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이야!'라는 겁니다. 그 말이 가진 힘이 있어요. 질문하는 사람을 치켜세워준다는 거죠.
아이가 어려운 질문을 했다면 무조건 '칭찬각'입니다. '와,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이다!'라고 칭찬해 주고 함께 공부하고 찾아보면 됩니다. 아이가 기특한 상황이지 엄마가 부끄러운 상황이 아닙니다.
토론은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대등한 입장에서 나누는 겁니다. 관계가 동등한데 왜 싸울까요? 엄마표에서 싸움이 나는 경우는 보통 엄마가 '내가 아이보다 우위에 있다'라고 생각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태도, 답변, 주장 등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 감정이 상하고 싸움으로 가게 되는 거죠. 토론을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동등한 관계로 인식해야 합니다.
다만 아무리 노력해도 싸울 것 같다, 하는 순간이 벌어진다면 거기서 그만두는 게 낫습니다. 나중에 다시 감정이 차분해진 상태에서 이야기 나누면서, 그때 싸울 뻔했던 상황을 두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에 대해 토론을 해보는 것도 방법이고요. 실수를 통해 서로 배워가는 것, 상대의 입장이 돼보고 배려를 배우는 것도 토론의 장점이죠.
토론의 습관화죠. 이건 아무리 훌륭한 사교육이라 해도 절대 해줄 수 없습니다. 매일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크고 작은 질문과 대화로 토론을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 습관으로 만드는 건 엄마표에서만 가능합니다.
또 하나 아이의 내면을 다지고 생각의 깊이를 만들며 조금씩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엄마표일 때만 할 수 있는 일이죠.
토론을 빌어 다양한 대화를 하다 보면 내 아이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아이도 엄마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처럼 믿음과 신뢰가 구축된 관계에서는 사춘기 걱정을 크게 할 필요가 없어요. 토론이라는 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잖아요. 그걸 숱하게 대화를 통해 경험한 관계에서는 설령 부모와 아이 사이에 갈등 요소가 들어온다 해도 풀어갈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내가 잘 아는 아이'를 믿고 기다려줄 수 있는 거고요.
관계적 측면만이 아니라 학습적으로도 엄마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토론은 당장 필요할 때 시작하면 늦어요. 모든 공부는 기본기, 펀더멘탈이 중요합니다. 토론은 말할 것도 없죠. 어릴 때부터 천천히 엄마와 함께 토론 기본기를 다진 아이들은 정작 토론 능력을 발휘해야 할 순간에 거침없이 그 능력을 펼쳐 보일 겁니다.
우선 뉴스를 선택한 이유부터 말씀드려 볼게요. 개인적으로 뉴스를 만들던 사람이라 친근했고 아이도 뉴스와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뉴스는 토론 교재로 장점이 많았습니다. 매일 새로운 뉴스들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고, 인터넷에서 검색만 하면 아주 오래된 자료들까지 무수히 많은 정보와 이슈를 찾을 수 있어요. 주제뿐만 아니라 형태도 아주 다양합니다. 따라서 내 아이를 위한 딱 맞춤 주제와 형식의 뉴스를 찾는 게 쉽죠. 또 하나 뉴스는 세상을 보는 창입니다.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는 문제들을 간접 경험하고 생각해 보고 때론 비판적 시각으로 분석도 해보고 해결책을 고민해 보는 데까지 가능합니다. 저는 아이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찾아나갈 수 있기를 바랐는데요, 그런 면에서 우리가 속한 사회의 수많은 이슈를 다뤄주는 뉴스야말로 더없이 좋은 토론 교재라고 생각했어요.
뉴스를 가지고 토론할 때, 먼저 주제를 찾을 때는 아이 흥미와 관심사를 반영해서 검색을 하거나 시의적인 뉴스 중에서 고르면 되는데요, 가능하면 같이 읽고 핵심 내용 파악을 함께 해보는 게 좋지만, 만일 어휘나 문장 등이 아이 연령에 비해 어렵다면 엄마가 먼저 읽고 설명해 주는 방식도 괜찮습니다. 또 어떤 토픽의 경우는 카드뉴스, 그래픽 뉴스, 영상 뉴스 등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 그중에서 골라도 좋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텍스트 뉴스보다 영상이나 그래픽 같은 요소가 포함된 뉴스가 훨씬 효과적일 때도 있습니다.
뉴스 내용을 공유한 후에는 특정한 질문의 패턴을 따라 토론이 진행될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아이의 생각을 묻는 질문, 두 번째는 상대 즉 다른 사람의 생각을 추측해 보는 질문, 그리고 여러 의견을 종합해 해결책을 찾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넌 어떻게 생각해"에서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할까, 의견이 다른 이유가 뭘까?"로, 또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로 연결해 보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단순한 질문 패턴마저 쉽지 않을 수 있어요. 아이에게 생각을 물으면 아이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반대로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땐 아이에게 답을 종용하지 말고 엄마의 생각을 먼저 말해주면서 모델링을 해주는 게 좋습니다. 그 후로도 아이가 자기 의견을 선뜻 답하기 어려워한다면 엄마가 이런저런 다양한 의견을 역할극 하듯이 제시해 보면서 아이가 '거창한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분위기를 형성해 주면 좋습니다.
제가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토론은 상대를 이해하면서 함께 나누는 가장 깊은 형태의 대화이고, 그 대화를 오래 한 관계라면 당연히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엄마표 토론을 아예 시작하지 않는 분은 있어도 한번 그 맛을 들이고 즐거움을 깨닫게 되면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은 갖고 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우리 집에서는 정말 매일 너무 다양한 대화가 벌어집니다. 길 가다가 마주치는 사물 하나, 퍼뜩 떠오르는 누군가의 이야기, 오늘 아침에 접한 새로운 뉴스, 며칠 전 읽었던 책 등 모든 소재가 불쑥불쑥 대화에 끼어들고 그걸 시작으로 끊임없이 대화와 질문이 오고 갑니다. 지인들이 우리 집 대화 상황을 보거나 들으면 "드라마냐?"라고 물을 정도죠. '대화가 잘 되는 우리 가족'이라는 자부심은 저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어쩌다 오은영 박사님 출연하시는 방송을 보다가 가족 소통이 안 되는 장면을 마주하면 아이가 말합니다. "저 집도 우리 집처럼 대화가 잘 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라고요.
이 기쁨과 행복을 새해엔 더 많은 분들이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