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시는 프로젝트 디베이터를 어떻게 이겼나
총 다섯 차례의 대국에서 알파고는 4승을, 이세돌 구단은 1승을 거두었죠. 이세돌 구단이 연달아 세 번을 질 때 많은 '인간들'은 그야말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 인공지능을 어떻게 이기겠어?' 하면서도 부디 이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겠죠. 그렇게 세 번의 대국을 통해 인공지능의 약점을 파악한 이세돌 구단이 4번째 대국에서 승리하자 '인공지능도 이길 수 있다'는 강한 희망에 모두가 환호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나 3년 후 이세돌 구단이 은퇴하면서 남긴 말은 의미심장했는데요, 그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인공지능이 나오니, 미친 듯이 해서 다시 일인자가 돼도 제가 최고가 아니더라. 내가 지독하게 해도 컴퓨터에 밀린다는 것을 느꼈다"라며 "일인자가 돼도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인공지능 알파고를 유일하게 이긴 인간이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벽에 대해 거론하는 순간이었죠.
이세돌 구단이 은퇴하던 그 해 2019년 2월 11일(미국 현지 시간), 또 다른 '인공지능 vs 인간'의 대결이 열렸습니다. 이번엔 토론이었습니다. 언어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바둑 대결보다 더욱 인간에게 강점이 있다고 여겨지는 대결이었죠. 인공지능이 '똑똑'하기는 해도 토론은 또 다른 문제니까요.
IBM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토론형 AI '프로젝트 디베이터'에 맞서 나선 토론자는 세계 토론대회 최다 우승자인 해리시 나타라잔. 논제는 '유치원에 보조금을 지불해야 하는가'였고 프로젝트 디베이터가 '찬성', 해리시 나타라잔이 '반대' 측이었습니다. 같은 조건에서 15분을 똑같이 준비한 다음 프로젝트 디베이터가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진행자가 "후손들에게도 말해줄 수 있는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렇게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열렸습니다.
4분 동안 각자의 주장, 4분 동안 서로의 의견 반박, 2분간의 마무리 발언 순으로 진행된 이날의 대결에서 결국 해리시가 승리했습니다. 청중들의 '입장 변화'가 승리의 기준이었는데 토론 전 투표에서 '찬성 79% vs 반대 13%(기권 8%)'였던 것이 토론이 끝난 후 '찬성 62% vs 반대 30%(기권 8%)'로 나타난 것이죠. 다만 사회자가 청중에게 "두 토론자 중 누가 여러분에게 더 풍부한 지식을 나눠주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프로젝트 디베이터라고 응답한 비율은 55%, 해리시라는 응답은 22%로 나왔다고 합니다. **
사실 이 질문에 대해 해리시라고 응답한 22%의 비율이 적지 않게 느껴지는 까닭은 정보나 데이터의 수집 차원에서 인간의 인공지능의 능력을 따라가기가 사실상 무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베이팅 세계 챔피언 서보현의 하버드 토론 수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 <디베이터>의 서보현 저자는 이 대회를 직관한 후 프로젝트 디베이터에 대해 "초인적인 증거 수집 능력을 제대로 발휘"했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토론을 통한 설득에는 '주장의 논리성', '증거의 중요성', '충분한 데이터'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디어를 풀어내고, 청중과 유대를 쌓고, 더 섬세한 차원에서 반론을 제기하는 일에는 무능**'했던 것이죠. 반대로 해리시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를 근거로 기계적인 여성 목소리로 말하는 인공지능에 반해 해리시는 인간적인 요소-예를 들면 목소리 톤이나 제스처, 표정 등을 통한 열정적 모습과 감성적 호소-를 적극 활용하며 청중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토론에서 진 후 IBM은 시스템의 편향성 개선을 위해 학술 저널, 뉴스, 검증된 기관의 자료만 수집하도록 조정하는가 하면, '인간적 요소'가 설득에 필요함을 인정하고 프로젝트 디베이터의 표현력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한계가 있다는 인정도 함께 말이죠.
그리고 해리시와의 토론 대결로부터 2년 뒤인 2021년, IBM은 인공지능 왓슨에 AI기반 자율 토론 시스템 '프로젝트 디베이터'를 추가해 상용화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했습니다.
해리시와의 토론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프로젝트 디베이터의 활약에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프로젝트 디베이터는 빠른 시간 안에 엄청난 데이터를 습득하는 능력은 물론, 복잡한 정보를 분석하고 일관된 주장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AI가 토론자로서 가진 잠재력을 보여주기도 했죠.
이세돌 구단은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라고 했지만, 토론 분야에서는 AI가 아무리 고도화된다 하더라도 완전히 인간의 강점을 복제하거나 따라잡을 수 없다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물론 챗GPT 등 뛰어난 자연어 처리 능력을 갖고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보다 더 많은 정보와 데이터를 빠르게 습득하고 처리하는 AI가 본격화된 시대에 인공지능이 훌륭한 토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토론의 목적은 '설득'이고 결국 객관화한 근거와 수많은 데이터, 논리 정연하게 정리된 주장들만이 유일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건 아닌 거죠. 프로젝트 디베이터와 논쟁을 할 때 주장 하나하나에 대해 반대되는 근거와 데이터를 제시하며 반박하는 전략이 아닌, 청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논점을 공략했던 해리시처럼 강점을 더 극대화하는 토론 전략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솔직히 정보, 데이터 등 인공지능의 강점을 인간이 넘어서기는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요.
물론, AI가 더욱 발전하고 정교해지면서 인간이 가진 강점을 AI가 학습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을 완벽하게 복제하는 일은 불가능하죠. 즉, 여전히 창의성, 감성과 감정, 공감력 등은 인간 고유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토론은 아직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공지능이 가진 강점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토론력을 개발하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논쟁적 요소가 다분한 시의적인 논제나 아주 고전적인 논제를 두고 AI와 토론을 해보기도 하고, 이 경험을 나누기 위해 토론 수업을 진행 중인 친구들에게 AI와 토론하는 과제를 내주기도 합니다. 단순히 AI를 경험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습득하기 위함을 넘어 대단한 학습자이자 똑똑한 토론자인 AI를 대상으로 토론을 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명확하기 때문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글 '인간 vs 인공지능의 토론 2편'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1.**가 표기된 부분은 서보현 작가의 저서 <디베이터> (문학동네)에서 습득한 자료나 인용 글이 포함돼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2. 커버 이미지는 이미지 생성 AI 프로그램인 미드저니로 만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