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하면 두 말 안 하고 따라나서던, 아니 두고 갈까 봐 먼저 채비를 갖추고 기다리던 시절의 아이는 사춘기 시작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어디 한번 가려고 하면 "어딘데?" "얼마나 걸리는데?" "왜 가는데?" "가서 뭐 할 건데?" "언제 돌아올 건데?"와 같은 쏟아지는 질문에 답을 하는 절차부터 시작해 왜 함께 가야 하는지, 아니 함께 가면 좋은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길고 깁니다.
좋은 말로 하다 하다 안 되면 결국 쓰는 수법은 "가기 싫어? 알았어, 그러면 엄마랑 아빠만 다녀올 테니까 너 혼자 밥 챙겨 먹고 저녁까지 있을 수 있지?"라고 진짜 그럴 것처럼 쿨하게 말합니다. 그걸로 끝나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덧붙여 남편을 향해 "오늘은 우리끼리 가자. 이제 다 커서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좋을 거야. 우리도 돌아오는 시간 신경 안 써도 되니까 편하고 좋잖아!"라고 오히려 더 홀가분하다는 듯 쐐기를 박죠.
그러면 백이면 백, 아이는 "나 갈 거야!"라고 반응을 합니다. 잘 모르겠지만 그 상황이 어쩐지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모양이에요.
뭐 아직까지는 그렇지만 조만간 이 수법 또한 안 먹히는 날이 오겠지요. 진심으로 엄마 아빠가 둘이서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기를(그래야 자기 맘이 편할 테니까요) 바라는 때가 올 것임을 압니다.
당일치기, 혹은 몇 시간짜리 외출도 구구절절 질문과 답변이 필요한데 며칠간의 여행이나 휴가는 말할 것도 없겠죠. 다른 건 몰라도 여행이나 휴가에 관해서는 부모가 제시한 대로 잘 따라와 주던 아이가 지난해부터는 달라졌습니다. 목적지, 기간부터 심지어 숙박의 형태와 삼시세끼 먹거리에 이르기까지 자기 목소리를 많이 내는 편인데요, 그러다 보니 떠나기 직전에 많은 것들이 결정되곤 했었죠.
올해는 작년과는 상황이 또 달라져서 본격 사춘기기 시작됐으니 거기가 어디가 되었든 별로 내켜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간다 해도 '휴양지형'을 원할 게 뻔했어요. '거기가 어디든 내 컴퓨터만 있다면 좋아'라고 외치는 아이는 어디서든 와이파이를 접속해 친구들과 연락이 닿을 수 있는 곳, 원하는 시간에 맞춰 게임을 할 수 있는 곳을 강력히 바랄 테니까요. 낯선 경험이니 체험이니, 이런 건 그저 부모의 바람일 뿐인 거죠.
해서, 올해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던 지난 6월,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아이와 상의를 하자니 무슨 답이 나올지 알겠고, 그렇다고 요구 사항을 수용해 줄 수 없어서 어떤 전략을 써야 하나 골치가 아팠죠. 남편은 각자 하고 싶은 일 하고 책 보고 쉬는 '휴양'을 원했지만, 저는 완전 반대였습니다.
사춘기 첫 문턱에서 가는 여름휴가인데 이때부터 '각자' 형태로 시작하면 앞으로도 내내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죠. 더구나 안 그래도 친구들 좋아하고 온라인에서 수시로 친구들과 소통하고 게임하면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그럴 기회 자체를 아예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어요. 적어도 휴가를 보내는 며칠만은 디지털 디바이스를 모두 내려놓고 가족끼리 온전히 함께 걷고 대화하고 웃고 먹고 소소한 즐거움들을 나누면서 보내고 싶었거든요.
우선 남편과 논의 끝에 결정한 큰 그림은 '휴가지는 우리가 결정하되 나머지는 아이에게 전권을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가족 모두 이번 휴가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기로 하고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일절 가져가지 않기로 '합의'하자는 내용도 포함했죠.
뿐만 아니라 가족 휴가에 대한 흥미와 기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 하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지 않은 게 더 많다는 점, 본인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수시로 불만과 짜증이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는 점 등 사춘기적 특징을 고려해서 어떻게 하면 이번 휴가를 즐겁고 행복하고 '무탈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 내린 몇 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행의 목적지는 뭔가 '대화 거리'가 있되 아이에게 새롭고 낯선 경험이 될 만한 장소가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교토. 아이를 임신했을 때 갔던 곳이라 그 시절 이야기를 아이에게 해줄 수 있고, 둘이서 다닐 때와 셋이 된 후 얼마나 더 즐겁고 행복한 여행인가에 대해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목적지 선택의 '배경 스토리'가 있으니 아이가 크게 반발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했고요.
예상대로 아이는 썩 내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가봤던 도시가 궁금하지 않니?'라는 동화적 상상을 발휘한 설득에 넘어갔습니다.
목적지는 엄마 아빠가 정했지만 나머지 플랜은 아이에게 맡긴 점도 유효한 전략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는 이번 기회에 먹고 싶었던 라멘을 실컷 먹고, 맛집 탐방을 해보겠노라며 몇 날 며칠을 구글맵과 여행 관련 사이트, 챗GPT 등의 도움을 받으며 고민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3박 4일의 플랜을 '먹거리와 맛집 동선 위주'로 짠 아이가 떠나기 이틀 전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 두 말도 하지 않고 '수용'했습니다.
물론, 사실상 맘에 드는 부분은 극히 적은 계획이었습니다. 심지어 실행이 가능할까 싶은 부분도 있었고요. 그러나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남편이 혹 부정적인 코멘트를 날릴까 싶어서 "오 너무 좋다! 혹시 변경이 필요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땐 또 그때 가서 상의하자!"라는 말로 차단했죠. 다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차의 지연과 낯선 지리에 대한 감각 등으로 예상 시간보다 늦게 호텔에 도착하면서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첫 동선이었던 시장과 인근의 맛집은 문을 닫았거나 닫기 직전이어서 첫날부터 플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죠. 게다가 다음날부터 여행 기간 내내 이어진 폭염은 내내 걸림돌이 됐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로 '더워서 못 가겠다' 라거나 '무리한 일정이니 건너뛰자'는 말을 하지 않았죠. 다만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객관적 언급을 해주면서 판단을 전적으로 아이에게 맡기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네 계획대로 하려면 내일 아침에 조식을 건너뛰고 나가야 할 것 같아. 첫 번째 목적지 가는 교통수단을 검색해 봤더니 갈아타는 노선의 버스 간격이 30분이래. 시간을 정확히 맞추지 못하면 더위에 30분 간 버스를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서 가능하면 해가 쨍하지 않은 아침 일찍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말하니 아이는 눈빛이 흔들릴 수밖에요. 다른 건 몰라도 더위에 버스를 30분이나 기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진 거겠죠. '엄마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라고 의견을 묻는 아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네가 원하는 거면 무조건 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생각해 보고 그래도 가고 싶다면 말해줘."
충분히 예상이 되겠지만 아이는 '안 가도 될 것 같다'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비슷한 일은 이후로도 몇 번 더 있었는데요, 그럴 때마다 남편과 저는 상황만 제시한 후 모든 선택을 아이에게 맡겨서 '결국 여행 계획의 책임자는 나'라는 생각을 아이가 하게 만들었죠. 그러다 보니 자신의 선택이 설령 잘못되었다 해도 짜증을 부리는 법이 별로 없었고요.
아이의 여행 플랜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먹을거리와 맛집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찾아본 정보와 실제 상황이 다른 경우가 많아 리스트에 있었던 많은 레스토랑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죠. 그럴 때는 플랜 B와 C를 함께 상의한 후 최대한 아이의 니즈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방문이 가능한 경우에는 어떻게든 '경험해 보는' 쪽을 택했고요. 아이의 원픽 중의 원픽이었던 유명 라멘 맛집 같은 경우에는 웨이팅 시간을 줄이기 위해 오픈 시간에 딱 맞출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했는데, 심지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세찬 소나기를 맞으며 무려 20분 이상 길거리에서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 잊지 못할 경험을 남겼죠.
아이가 처음에 계획한 많은 일정들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여행 후 만족도가 최상이었던 데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던 최상위 선택지들에 최선을 다해 실행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짜증을 '별로' 부리지 않았단 거지 전혀 없었단 얘기는 아닙니다. 10분만 걸어도 숨이 막히는 상황에서 아이의 인내심을 자주 바닥이 나곤 했습니다. 역사적인 건축물도, 아름다운 성과 정원도, 다양한 볼거리도 아이를 견디게 하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많았는데요, 그럴 때면 불만과 불평도 새어 나왔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돌아가야 할 때, 버스 방향을 잘 못 타서 내려서 다시 갈아타야 할 때 등 부모의 사소한 실수 앞에서 짜증 섞인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저희 부부는 똑같이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화를 내거나 짜증으로 대응해 분위기를 망치는 대신 지금은 모두 덥고 지치는 상황이라는 점, 즐거운 가족 여행 중에 서로의 잘못을 따지거나 비난하는 말투는 하면 안 된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당시의 힘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옵션을 제시하는 식으로 아이의 감정적 반응에 대처해 나갔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사전에 남편과 이야기가 된 부분이었는데요, 더운 날씨에 여행을 하는 만큼 충분히 예견되었던 터라 어떤 경우에도 부모가 화를 내고 크게 야단을 쳐서 여행을 망치는 데까지는 가지 말자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알려주고, 정 안될 것 같으면 일정을 접고 호텔에 돌아가 쉬는 한이 있어도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지 말자고 약속을 했었죠.
사전에 너무 많은 상황을 예견하고 준비했던 덕분일까요, 3박 4일간의 여름휴가의 기억은 온전히 즐겁고 행복하게 남았습니다. 재밌는 건, 마지막 날 갑자기 폭우가 예보돼 모든 일정을 접고 오후에 일찌감치 호텔로 돌아와 루프탑 테라스에서 우산 들고 가끔 비 맞으며 수다 떨고 노래 부른 기억을 아이가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꼽는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