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냉장고는 채우고 마음의 짐은 덜어내고

마지막 장보기, 그리고 반드시 만났어야만 하는 사람

by 어나더씽킹

# 아무렴, 며칠이 남았든 먹고사는 게 제일 중허지.

마트가 문을 열자마자 장을 보러 갔다. 보통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바로 가는 그 시간이 오픈 즈음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동선을 줄일 목적으로 그 시각에 가는 것도 있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로는 그나마 덜 붐비는 시간대를 찾다 보니 더욱 아침 장보기를 선호하게 됐다.

베를린 생활 초창기에는 마트만 가도 좋았더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기하고 재밌었으니까. 한국에서 못 보던 품목을 구경하는 재미도 좋았지만, 카트 가득 물건을 실어도 한국보다 적게 나오는 것도 흐뭇했다. 돈 쓰면서도 돈 버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느낌이랄까.

어느 순간부터 장보기는 그냥 일상이 됐다. 더 이상 신기할 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매번 차 끌고 가서 무겁게 짐 고 오는 자체가 힘들게 느껴졌었다. 온라인을 시키면 좋았을 것이란 사실을 왜 모르겠나. 한데 이곳의 온라인 배송 서비스는 거의 신생아 단계다. 그나마 코로나 이후 온라인 서비스가 대폭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그래도 종종 온라인 배송 덕을 보기도 했다. 문제는 온라인 주문을 하더라도 꼭 마트에 가야만 살 수 있는 품목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마트를 가고 말지, 하는 심정으로 힘들어도 직접 사서 들고 오는 수고를 택했던 것 같다.

오늘 아침 장보기는 그러니까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장보기다. 지난 주말에 한 차례 장을 보면서 '어쩌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으나 택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렴, 먹고사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며칠 후에 떠날 거지만 그래도 냉장고는 채워져 있어야 불안하지 않으니까.

소고기 많이 먹고 가자는 생각에 스테이크용 고기를 잔뜩 사고, 거기에다 올여름 음료 대신 나의 갈증을 책임 진 자몽맛 알코올 프리 맥주며 좋아하는 치즈와 코파 살라미, 그리고 한국 가면 엄청 비싸게 사야 할 멜론도 두 통이나 샀다. 그뿐이랴. 고작 나흘 먹는 것 치고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식재료와 과일, 간식 등을 잔뜩 카트에 실으면서 '그래, 마지막 마트 쇼핑이니까 맘껏 해보자' 했다. 그래 봐야 뭐 얼마나 나오겠어, 하는 맘으로.

그랬다. 계산대 앞에 섰는데 직원이 85유로가 나왔다고 했다. 베를린에 온 첫날, 마트에서 이것보다 더 많은 양을 사고도 그 정도의 돈을 냈던 기억이 소환됐다. 이러다가 한국 가서 장 보면 다들 멘붕 온다는데,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마트를 나서는데 입구에 선 직원이 "Auf Wiedersehen(아우프 피더진)' 이라고 인사했다. 굿바이, 란 뜻이다.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Tschüss(츄스)". 안녕, 에데카.

수많은 종류 중 고르느라 매번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맥주 및 와인 코너(좌). 나의 페이버릿 자몽 맛 알코올 프리 맥주.

# 친정 같고 시댁 같았던 삼일상사와도 작별의 시간.

베를린 올 때 이민 가방에 온갖 식재료를 바리바리 싸들고 왔었다. 한인 마트 있다고, 웬만한 건 다 있다고 품목이 다양하지 않을 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다 살 수 있다고, 다들 그렇게 말해줬는데 뭐가 불안했던 것인지. 거의 가방 하나 가득 먹거리로 채워 온 것을 나중에는 후회했다. 심지어 가방 무게가 초과해 공항에서 40만 원이나 더 지불한 게 억울했다. 그 돈으로 차라리 사 먹었으면 덜 고생하고 더 편했을 텐데.

베를린에는 공식적으로 두 개의 한인마트가 있다. 삼일상사와 신라. 신라는 그 맛이 일품인 매운탕이 시그니처 메뉴인 레스토랑이기도 해서 마트의 기능은 사실 절반이다. 그만큼 물건이 많지 않다는 뜻. 아이가 다니는 학교 지척에 있는 삼일상사는 정말이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한국의 맛이 그리울 틈이 없다. 신기하게도 한국에 살 때다 더 한식을 많이 찾는 아들아이 때문에 나는 삼일상사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식재료부터 아이가 좋아하는 한국 과자, 심지어 온갖 종류의 떡도 판다. 설날이며 추석 등 괜히 지나가면 너무 섭섭한 명절에는 삼일상사 덕분에 한국이 그리울 일이 없다. 떡국떡과 만두를 사다가 떡국을 끓여먹고, 추석에는 알록달록 예쁘기까지 한 송편도 판다. 70유로 이상을 사면 원하는 떡 한 팩을 서비스로 주시는데 그때마다 마치 친정 같다는 생각도 했다. 혹자는 물건 상태를 잘 유지하지 못한다고, 유통기한 지난 것도 섞여있을 때가 많다고 불평하기도 했고 동의하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삼일상사 덕분에 잘 먹고살았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다.


삼일상사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에어비앤비로 옮기면서 김치를 담글 수 없게 돼, 며칠간 먹을 김치를 사야 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 핑계로 인사를 드리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래 봐야 주인과 손님으로, 많아야 일주일에 한 번 어쩌다 두 번 들르는 곳이었는데도 남다른 정이 들었다. 특별히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3년 넘게 다니는 동안 우리 아이가 크는 모습을 지켜본 사장님은 매번 많이 컸다며, 살가운 이야기를 건네주곤 하셨다.

"저희 이제 한국 가요, 사장님." 사장님은 많이 아쉬워하셨다. 그리곤 그동안 고마웠다고 하시며 아들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백설기를 한 팩 내미셨다. 약간 코 끝이 찡했다. "저도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덕분에 부족함 없이, 한국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았네요."

아 그러고 보니 신라 사장님께도 인사드려야 하는데. 신라 매운탕도 꼭 한 번 더 먹고 싶었는데.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삼일상사.

# 네가 너무나 그리울 것이란 사실, 그것이 가장 중요해.

나에게는 독일인 친구가 한 명 있다. 학교 학부모로 만나 친구가 된 우리. 그녀는 아시아인들을 좋아하고 아시아 화에 관심이 많다. 아이들이 한 번도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는데 1학년 때 방과 후 수업으로 유도 클래스를 들어가면서 알게 됐다. 한두 번 아이를 기다리다 인사하고, 어쩌다 놀이터에서 함께 어울려 놀게 되면서 우리는 그렇게 친해졌다. 둘 다 아들 하나라는 공통점에 미국인 남편이 아시아 컴퍼니에 다닌다는 것까지 더해져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았다.

영어로 대화해야 하는 상황 상, 말보다는 문자와 이메일이 더 편했던 나는 그녀와 어쩔 때는 하루에 수 차례 문자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일상을 공유하고 지냈다. 독일어가 안 되는 나를 위해 그녀는 기꺼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달려와주었고 적극적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나는 정말 행운이었다. 타지에서 이렇게 친절하고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기다니.

가족들끼리 자주 어울릴 만큼 우리는 거의 가족처럼 지냈다. 서로의 집을 허물없이 오갔고, 내가 만든 김치와 그녀가 만든 케이크와 빵을 틈날 때마다 나눠 먹었다. 물론 100% 언어의 장벽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게다. 그런데도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친구가 준 선물, 한국 가서 열어보라고 신신당부했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건 나의 귀국이 임박하면서부터였다. 애초 8월 초 귀국할 예정으로 그에 맞춰 5월부터 준비에 들어간 나는 바빴다. 독일이란 나라 자체가 이곳을 떠나는 과정이 간단치 않았고, 나는 한국에서의 생활이며 아이의 학교 문제, 나의 잡 등에 대한 고민으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친구는 서운해했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이밍에 나는 오히려 더 그녀를 덜 만나게 됐다.

그때부터 약간 감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 같다. 사소한,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상황들에 그녀는 자꾸 날이 선 반응을 보였고, 나는 나의 바쁘고 정신없는 상황들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그녀에게 되려 섭섭했다. 남편은 여고시절을 보는 것 같다며, 놀렸지만 나는 몸과 맘이 고단한 상황에서 감정적 문제까지 겹쳐 점점 지쳐갔다.

그러던 무렵, 어떤 계기가 있었고 그 일 이후 우리는 거의 문자도 이메일도 전화도 하지 않은 채, 심지어 학교에서 어쩌다 우연히 마주쳐도 못 본 척 지나치는 경우까지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풀려고 하면 점점 더 꼬여만 가는 실타래처럼, 그랬다.

그래도 한 번은 풀어야 했다.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돌아가고 나면 나는 깊은 후회에 빠져 매일 그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가 한 번은 만나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동의했고 드디어 그 날이 오늘이었다. 그녀의 집에서 만난 우리는 여느 때처럼 허그로 시작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따뜻한 대화를 나눴고 허그로 마무리했다. 중간중간 지난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머릿속이 복잡하기도 했지만, 내 결론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였다. 중요한 건 내가 여전히 그 친구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것, 우리는 통하는 점이 많다는 것, 지금의 작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쉽고 슬프다는 것,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님을 강하게 믿는다는 것, 어디서든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 그것들이었다.

친구도 나도 서로 눈물을 보이진 않았다. 가끔 그녀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것도 같고 그녀도 아마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여느 때처럼 웃었고 즐거웠고 마지막 인사는 며칠 뒤에 한 번 더 하자, 고 그러니까 오늘은 마지막이 아니라는 말로 서로를 위로했다.


베를린에서 만난 귀하고 감사한 인연이 참으로 많다. 타지에 산다는 건, 그 인연이 얼마나 귀한지를 한국에서보다 몇 배 강하게 깨닫게 하는 것 같다. 내가 그 친구를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지, 나는 지금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