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많이 다녀봤잖아, 짐이 좀 더 많은 것뿐
# 잘 가, 마이카, 너로 인해 행복했어.
늦잠을 잤다. 8시 넘어야 해가 뜨는 요즘, 주중에는 깜깜할 때 일어나야 하는데 주말이라 허락된 호사다. 요즈음 통 깊은 잠을 자지 못한 나는 그나마 좀 개운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전히 간밤에 얕은 수면을 취했는지 무수히 많은 꿈들과 함께였다. 긴장되는 순간에 항상 꾸는 꿈이 있다. 바로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보는 꿈. 나에게는 아마도 내 인생에서 그 날이 가장 긴장한 날이었나 보다. 어쩌면 폭망 한 시험 결과 때문인지도. 여하튼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거나 불안한 게 있거나 긴장해야 할 상황에 놓이면 나는 여지없이 수능 시험날 가운데 있고 오늘도 그랬다. 아, 내가 지금 심리적으로 편안하지 않구나, 나는 오히려 꿈을 통해 내 내면을 들여다본다.
자동차를 넘기기로 한 날이다. 귀국이 두 번이나 연장되면서 차를 넘기는 시점이 계속 늦어졌지만, 감사하게도 인수하기로 한 분의 배려로 마지막 날까지 이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딱히 어디 갈 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매일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하는 일 때문에 당장 차가 없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을 감수해야 했으니까. 다들 이래서 한국 사람들끼리 거래하는 걸 선호하는지도 모르겠다.
중고차를 거래할 때, 딜러에게 넘기거나 직접 거래를 하거나 둘 중 하나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인들은 가능하면 한국인들끼리 거래하는 것을 선호한다. 딜러에게 넘기는 건 제 값보다 낮게 가격이 책정될 수밖에 없으니 매각하는 입장에선 직접 거래를 원하는 게 당연. 그중에서도 한국인들끼리는 아무래도 신뢰가 형성되는 측면이 있다 보니 할 수만 있다면 한국인 간 거래가 좋긴 하다. 차를 사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좁디좁은 교포 사회의 특성상 누가 탔는지도 모를 차를 사는 것보다 당연히 한인 간 거래를 좋아할 수밖에.
우리 역시 지인의 소개로 한국 분과 거래가 성사됐고, 역시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다 보니 귀국이 늦어지는 개인적인 상황을 이해해주었다. 우리는 또 그 마음이 고마워 계약서 쓸 당시의 가격에서 상당한 금액을 네고했고. 귀국 전날에서야 차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차를 사는 분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소 절차를 거치지 않고 넘겼으니 상대가 신규 등록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나의 소유라 혹시나 무슨 일이 발생하면 그 책임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넘어오는 것이니까. 뭐든지 문서화해야 하는 독일의 특성상, 신규 등록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인수자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말소 과정을 밟느라 또 번거로웠을 게다.
인수자에게 차를 넘겨주러 가는 남편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갔다가 돌아오고 싶었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 온 가족이 굳이 대중교통을 탈 이유가 없으니 남편 혼자 다녀오기로.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 했다. 매일 아침, 오후 아이와 내가 15분씩 대화를 나누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했던 공간이 되어준 나의 차. 베를린에 처음 와서 신나게 유럽 대륙 밟아보자며 3박 4일로 떠난 '베네룩스 3국' 여행을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여행길을 함께 해준 우리의 또 다른 가족, 긴긴 여행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추억을 쌓았는지.
아이와 나는 차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허그라도 하고 싶었지만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대신하며.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그래도 네가 아는 분에게 가서 참 다행이야. 우리에게 많은 행복을 주었던 것처럼 그분들과도 좋은 추억 많이 쌓아. 가서 사랑받고 잘 살아야 돼!"
# 잠시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오후 무렵, 친구네 가족이 집 앞으로 굿바이 인사를 하러 왔다. 며칠 전, 친구를 만났을 때, 나중에 다시 인사하자, 고 했던 날이 오늘. 그러나 친구는 오지 않고 남편과 아이만 찾아왔다. 친구는 가족들을 보내기 전 전화를 걸어왔다.
"지니, 나는 못 갈 것 같아. 너를 만나면 너무 감정이 터질 것 같아서 안 가려고. 너희 가족이 잠시 한국을 다녀온다고 생각할 거야. 한 2~3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너희 남편 한국으로 파견 가는 거잖아. 일 잘 마치고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우리는 농담을 섞어가며 통화했다. 그러나 말과 말 사이 짧은 침묵이 여러 번 흘렀고, 쉽사리 전화를 끊지 못했다. 어렵게 어렵게 "내일 공항 가서 연락할게"라는 인사로 마무리하고 나니, 친구 남편과 아이가 도착했다.
길거리에 서서 10여 분, 우리는 짧은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베를린에서 서로를 만나 얼마나 다행이었고 행복했는지, 함께 해준 모든 시간에 얼마나 고마움을 느끼는지, 다시 만날 미래에 대한 강한 소망까지 우리는 다 같은 마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이 친구를 안아주는데 "I'll miss you."라고 말하다가 목이 메었다. 나를 '지니'라고 불렀던 아이, 학교에서 나를 만나면 가던 길을 가다가도 돌아와서 내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갔던 아이,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 뾰로통하던 귀여운 표정, 일주일에 한두 번 함께 축구하러 다닐 때의 기억들...
친구의 남편과도 허그를 나눴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 항상 함께 축구를 해주고 놀아줬던 고마운 사람. "고마웠어. 네 덕분에 우리 아들 축구 많이 늘었어. 정말 좋은 코치였잖아, 너. 다시 보자."
자전거를 타고 온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 패킹, 많이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유럽 대륙을 샅샅이 누리겠노라는, 남편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꿈을 처음엔 혼자 꾸었다. 독일에 이지만 한국 스케줄을 따라 일하는 남편은 심지어 주 6일을 일했고, 한국의 휴일도 독일의 휴일도 전혀 쉴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발을 묶이게 했다. 주말에도 어딜 갈 수가 없고 그 많은 연휴도 남의 떡이다. 오로지 아이 방학에 맞춰 가는 휴가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날.
긴 여행은 일 년에 두 번이었지만, 틈틈이 그래도 부지런을 떨었다. 안 되면 하루 쉬는 날 당일로, 남들이 1박 2일을 다녀오는 것만큼 부지런히 움직였다. 다행히 인근의 유럽 국가들은 비행기로 1~2시간 내에 거리인 곳이 많아 새벽에 움직이면 당일치기로도 일정이 가능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짐 싸는 일은 달인 수준이 됐다. 저가 항공을 타야 하니 어차피 많은 짐을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진짜 필수품 위주로 챙기는 짐 싸기는 늘 거기서 거기였다.
내일 귀국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 절차가 패킹이었지만, 그래서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에어비앤비로 이사를 한 터라 가지고 갈 것, 놓고 갈 것을 분류할 일이 없어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가방의 무게가 초과하지 않도록 분산하는 데만 신경 쓰면 될 줄 알았다. 한두 어시간이면 되겠지, 후딱 끝내 놓고 늦은 오후부터는 좀 여유롭게 보내야지 했는데 웬걸. 40일짜리 임시 생활도 어찌나 늘어놓은 게 많은지, 생각했던 만큼 간단한 패킹이 아니었다.
7시가 돼서야 패킹이 끝났다. 가방들을 늘어놓고 보니 왜 자꾸만 여행을 가는 생각이 드는지. 아이는 싸놓은 짐을 보다가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며 내 품으로 파고들어 눈물을 보였다. 아들에게 말했다. "뭐야, 짐 싸고 보니까 여행 가는 것 같잖아. 그렇지 않아?"
"엄마, 우리는 저렇게 큰 가방을 들고 여행 다닌 적이 없어."
그건 그렇지. 심지어 최장 기간 여행이었던 9일짜리 런던-테네리페를 갈 때도 달랑 기내용 캐리어 2개에 백팩 하나 메고 갔는데. 그래도 나는 우겼다.
"왜~ 1년짜리 긴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나는 나를 위로하고 싶었던 걸까, 아이를 위로하려고 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