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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씽킹 Mar 10. 2021

자극적인 인간

부족한 나를 채워주는 그 무언가

이상하게 자주 허기가 진다. 밥 이야기가 아니다. 좋게 포장하면 마음의 양식이라고 해야 하나.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이나 아쉬움이 있는 모양인지 자꾸만 마음이 헛헛하다. 겉으로 보면 내 삶은 더없이 평온하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몇 년간 독일 살이를 하며 마치 한 묶음이 된 듯 똘똘 뭉친 우리 가족, 그러니까 나와 남편, 아들아이 사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완벽하다. 눈 뜨면 어떻게 아이를 사랑하고 표현할까를 고민하는 남편과 나, 항상 초긍정의 마인드를 가진 아이 사이에는 좀처럼 이물질이 끼지 않는다. 유머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시종일관 강조한 나의 인생철학 덕분(?)에 집 안에는 웃음도 넘친다. 시답잖은 농담이나 언어유희와 함께.


그럼에도 나는, 아이가 학교에 간 뒤 바로 지금 같은 순간 굉장한 허기를 달래느라 애써야만 한다. 생각해봤는데 아이도 남편도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갔고 그들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시간에 나의 존재 의미를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니 드는 허기인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늘 뭔가로부터 자극을 받으며 살았고 그 자극을 즐기는 인간이었다. 대체로 그 자극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와중에 일어났는데 독일 거주 기간에는 갈 직장이 없었어도 주변 환경 자체가 자극의 연속이었다. 하다 못해 길 가다 만난 독일인이 그것도 독일어로 길을 묻는 사소한 상황도 자극이었다.(독일어 잘하게 생겼나, 왜 자꾸 나한테 길을 묻는지.. 사실 독일어 거의 못..) 몇 마디 단어로 겨우 답해주고 돌아서면 와, 독일어 공부해야지, 또 자극이 되곤 했더랬다. 물론 오래 못 가긴 했지만.


요즘 나의 허기를 달래주는 것들은 대개는 책이다. 그날그날 필요한 에너지의 종류에 따라 어떤 날은 이론서를 읽고 어떤 날은 인문학 서적을 읽고 또 어떤 날은 소설을 읽는다. 한 번에 여러 종류의 책을 읽느라  끝내기가 좀 오래 걸린다는 게 단점.

사실 나는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여행 에세이는 좀 읽는 편인데 그것도 보다 사실적인 이야기들 혹은 사진들이 많은 것을 좋아했다. 여행의 감상은 다 다를 수밖에 없기도 하고, 인간이 표현해낼 수 있는 감동이란 너무 제한적이어서 어떤 풍경이나 장면 앞에 서서 여러번 같은 감탄을 반복하는 여행에세이는 전혀 와 닿지도 않았다. 결론적으로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 남 이야기 들어서 뭐해, 어차피 인생은 다 각자 다른 몫인 걸, 하고 생각하는 젊은 날의 방자함 때문이었을게다.

어쩌다 너무 궁금해서(팔짱 끼고 째려보는 심정으로) 에세이를 사 보는 경우도 적지는 않았다. 도대체 그렇게 인기가 있는 이유가 궁금해서였는데 어떤 때에는 책값이 심하게 아까운 지경까지 있었다.


독일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한국에 있는 조카가 놀러 오면서 필요한 걸 사다 주겠노라 하기에 책 몇 권을 주문했다. 그중에는 당시 100쇄를 찍었다는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도 한 권 포함돼 있었다. 글쓰기, 인생 등 에 관련한 에세이였는데 조카가 말했다. "아, 저 그 책으로 독서토론도 했어요."  그렇구나.  똘똘한 대학생 조카가 그랬다니 기대도 됐다.

안타깝게도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진정으로 책값이 아까웠다. 저자의 일상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나열된 글들은 미안하지만 끊임없이 의심이 들었다. "이런 일이 진짜 있었다고?" 어떤 주고자 하는 쓰고자 하는 메시지, 독자들이 받았으면 하는 어떤 자극(혹은 감상?)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일화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경험한 일이라는 비판적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은 읽다가 포기.


그런데 요즘은 (전에 비하면) 에세이를 꽤 보는 편이다. 특히 인생의 깊이가 담긴 에세이를 읽고 있으면 그 어떤 것보다 나를 자극받게 한다. 앎에 대한 자극, 지적 능력에 대한 자극, 선한 영향력에 대한 자극, 삶의 통찰에 대한 자극, 일상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에 대한 자극, 관계를 풀어가는 능력에 대한 자극... 그도 아니면 어떤 이의 삶 자체가 주는 교훈이나 깨달음도 있다. 모두의 삶은 그 자체로 (같은 방식이 하나도 없는) 인생 교과서이니까.


오늘 아침 나의 허기는 이상하게도 예술 쪽이다. 아마도 어제 출판사 대표인 선배의 사무실에서 스치듯(디졸브, 보다는 좀 긴) 만난 예술사학자 한분 때문인 듯도 하다. 그림을 좋아하지만 잘 모르는 나는 그림을 통해 보는 역사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있다. 우리가 알지 못했단 작가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전에 읽었던 책의 어느 챕터를 다시 펼쳐 보아야겠다. 오늘의 자극은 그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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