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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씽킹 Mar 11. 2021

엄마, 공부를 해!

석 달 만에 사라진 내 영어

독일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근 두 달 만의 통화. 헤어질 땐 하루 멀다 하고 전화할 것처럼 서로 그랬는데 현실은... 8시간의 시차를 고려해도 좀 너무했다. 그래도 서로 이메일이며 왓츠앱 메시지를  자주 주고받아서인지 두 달의 공백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어찌나 반갑던지! 이역만리 물리적 현실적 거리감은 온데간데없고 당장 내일이라도 만나러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묘하면서도 쓸쓸했다.


학교 학부모로 만나 절친이 된 그녀는 독일인이다. 아이들이 단 한 번도 같은 반이 돼본 적이 없는데도 어쩌다 우리는 친해졌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만나고 하루에도 끊임없이 문자와 메일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남편 말에 따르면, 베를린에서 따로 영어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던 내가 그녀와 친해져 어울려 다니는 동안 늘어나는 영어실력이 보이더라고 했다.(그랬나? 초창기 생활과 달리 영어 쓰기가 최소한 어색하진 않았던 것 같긴 하다.)


친구의 용건은 김치 담그는 법을 다시 알려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베를린에 사는 동안 내가 담근 김치를 항상 공유하며 살았던 우리. 떠나기 전 우리 집에서 함께 김치 만들기를 하며 비법(인터넷 레시피다) 전수를 해주고 왔는데 당시 촬영해둔 영상이 휴대전화 고장과 함께 사라졌다고 했다. 아, 기억난다. 그날 무슨 '오늘의 요리' 찍는 기분이었는데...


김치 만드는 과정을 다 말로 할 수는 없으니 나중에 따로 사진 첨부, 이메일을 보내기로 하고 우리는 그간의 못다 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3개월 만에 다시 가기 시작한 베를린의 학교 생활 이야기, 코로나로 통제되는 생활 이야기, 서로의 안부와 공통으로 아는 친구들 이야기, 우리의 한국 생활과 스코틀랜드 스카이 섬 어딘가에 짓고 있는 그녀의 집 이야기 등...

베를린 떠나기 직전 함께 한 우리의 피크닉.

20여 분의 통화를 하는 동안 많은 대화가 오갔으나 사실 나는 많은 '말'을 하지는 못했다. 답할라치면 여지없이 한국어가 먼저 치고 나오고 머릿속에서 문장이 뱅뱅 맴도는 초기 베를린 생활의 영어 수준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 한국에 돌아와 영어 쓸 일이라곤 같은 반 학부모들과 단톡 방 대화 정도인데 그 역시 내가 대화를 주도하는 상황은 있을 일이 없어서 그저 누군가의 말에 피드백만 하면 그뿐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빛의 속도로 언어를 까먹는 건 아이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텍스트 메시지며 이메일 등을 꾸준히 써와서 고민 안 했는데 막상 입으로 나오는 언어들은 '어버버버' 하고 있으니 스스로 얼마나 부끄럽던지.


막힐 때 마이크를 객석으로 넘기는 가수의 심경으로 아이와 남편에게 가끔 전화기를 넘기며 무사히 통화를 끝내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와, 엄마 영어 다 까먹었네. 큰일 났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영어를 잘할 수 있니?"

나는 무심한 듯 제 할 일 하는 아들을 쫓아다니며 징징거렸다. 그런 나에게 아이가 말했다.

"엄마, 공부를 해!"

아, 그렇다. 정답이네. 할 말이 없다. 공부도 안 하면서 잘하고 싶다고 징징댔구나. 순간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웃기게 느껴져서 특유의 상황 반전 카드를 꺼냈다.

"아 그렇구나. 네 말이 맞아. 공부도 안 하고 잘하고 싶어 하다니 어이없다, 그렇지? 엄마를 보면서 너도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뭔가를 잘하고 싶을 때, 그런 열망이 내면에서 솟아날 때 그냥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해야만 비로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음을 상기하는 거지. 그리곤 네 안에서 어떤 질문 같은 걸 해봐. 공부란 무엇인가, 앎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타이밍에 애가 말을 끊어줘야 하는데, 더 이어갈 말이 없는데, 하는 순간 아이가 말한다. "엄마, 너무 철학적이야. 엄마 또 똑똑한 척하려고 그러지?"


아이와 철학책을 같이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가끔 저런 식의 대화로 웃을 때가 많다. 내가 주절주절 온갖 언어와 지식을 다 동원해 문장을 늘리고 있으면 여지없이 아이가 치고 들어온다. "엄마, 너무 철학적이야." 그만 하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우린 또 그만두고 하하호호.

그런데 사실 나는 그 유머러스한 상황을 빌어서 하고 싶은 말을 깨알같이 하는 편이다. 아이가 그걸 캐치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영어로 돌아와, 안 되겠다 싶어 구청에서 하는 원어민 영어클래스를 등록하려고 알아봤다. 한데 벌써 인원 마감. 대기번호 28번. 유튜브라도 봐야겠다. 요즘 좋은 영어학습 콘텐츠 차고 넘치던데. 그래 놓고 나는 지금 커피잔 옆에 두고  브런치를 끄적이고 있다.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엄마, 공부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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