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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씽킹 Mar 12. 2021

반강제로 20년 전을 소환하고 보니

냉동실에서 뜻밖의 재료를 발견한 기분?

20년 전 함께 일했던 PD에게서 며칠 전 페이스북 친구 신청이 왔다. SNS로만 안부 주고받는 사이인 같은 방송사 아나운서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보고 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사실 처음 친구 신청 메시지를 보고 '으잉???' 했다. 그분과는 딱 한 편을 같이 제작했을 뿐이라 사실 당시에도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던 이유다. 작가 한 명이 한 회를 전담해서 만드는 시스템 상 한 편이긴 해도 한 달을 함께 하긴 했지만 그 후 바로 잡지사로 이직하면서 방송국에서 오가다 얼굴 볼 일도 없는 사이가 됐더랬다.


20여 년 만에 짧게나마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처음 어색하던 기분은 사라지고 어느새 추억을 곱씹고 있었다. 20대 중반 이른 나이에 메인 작가가 돼, 있는 내공 없는 내공까지 다 쥐어짜느라 매일 스스로를 닦달하며 살던 그 시절, 한 회를 만들어 방송 내보내고 스탭 스크롤에 내 이름 올라가는 거 보면서 그 맛에 또 참고 일하던 시절의 나를 떠올리니 새록새록 신선했다.


마치 내 인생에 없는 페이지였던 듯 잊고 살았던 시절을 다시 (반강제적으로) 소환하고 보니 문득 기억 혹은 추억에 유통기한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마치 블랙홀 같은 냉동실처럼 저 구석 어딘가에 처박힌 케케묵은 기억들을 다시 꺼낼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을 뿐. 냉장고 정리하다 뜻밖의 귀한 재료를 발견한 기분으로(물론 버려야 할 쓰레기들도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나는 어제오늘 20대 언저리의 나를 떠올리며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고 있는 중이다.


지나고 나면 다 미화되는  과거라지만, 그 시절엔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 만큼 아팠던 기억들도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그랬어야 할 일, 다시 돌아가도 그 길이 옳은 선택, 온 우주가 합심하여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들어낸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감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나저나 연락이 된 PD와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서 '라떼는 말이야'나 하다가 오는 건 아닌지. 20대와 30대에서 40대와 50대가 돼 만나는 그 첫 장면을 어림짐작 예측해보니 이건 뭐 '아이러브스쿨' 혹은 'TV는 추억을 싣고'가 따로 없네. 그래도 살면서 예기치 않게 이런 이벤트가 생기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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