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나더씽킹 Jan 13. 2020

"독일어 해서 뭐하려고요?"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가 올 테니까

독일에 와 살기 시작한 지 6개월쯤 지났을 무렵, 아이에게 첫 독일어 튜터를 붙였다. 당시만 해도 이제 막 영어를 좀 알아듣고 학교 생활에 큰 불편이 없을 수준이었지만, 그로부터 6개월 뒤 학교에서 시작할 독일어 수업에 대비하는 차원도 있었고, 어차피 영어처럼 알파벳을 근간으로 하는 언어이니 같이 시작해도 좋겠다 싶었다. 한편으론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면 자연스레 영어 회화까지 얻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독일어 공부를 시키기로 한 가장 이유는 우리가 독일에 살고 있기 때문에,였다. 주변에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환경에 있으니 독일어를 배우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으랴. 그래도 독일어보다는 영어가 우선이고, 독일 공립학교의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국제학교를 보내기로는 했지만, 독일에 사니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는 데는 남편도 나도 아이도 전혀 이견이 없었다. 다행히 공부에 욕심이 좀 있는 아이는, 친구들이 대부분 3개 국어(모국어, 영어, 독어) 이상 구사하는 것을 보면서 외국어 공부에 대한 열정도 있는 터였다. 


처음에 막상 어떤 방식으로 독일어를 가르쳐야 할지 몰라 조언을 구하는 나에게 몇몇 한국인 엄마들이 되물었다. "독일어를 해서 뭐하려고요? 여기서 쭉 살 거예요? 한국 가면 어차피 다른 거 할 거 많아서 독일어까지 유지해주기 쉽지 않을 텐데? 학교에서 하루 한 시간 독어 수업이 있는데 그 정도면 되지 않아요?" 당시 아이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독일어 수업 대신 영어 보충 수업을 듣고 있던 터라 학교에서 하는 독일어 수업의 양적 질적 수준을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되물었다. "매일 독일어 수업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수준이 괜찮은가 보네요? 그 집 아이는 어때요?" 대부분의 엄마들이 비슷한 대답을 했다. 천천히 배운다고, 주로 독일어 노래만(!) 부르더라고, 5개의 레벨로 나눠 수준별 수업을 하긴 하는데 몇 년 내내 초보 단계만 하는 애들도 많다고. 그리고는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다. "독일어를 해서 뭐하려고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독일어를 해서 뭐하다니? 사람이 외국어 하나 더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경쟁력인데? 입시니 취직이니, 이런 거 생각하지 않아도 남의 나라 말을 잘할 수 있는 그 자체로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데! 영어를 오직 한국에서만 배운 나는 외국살이를 하면서 '토종'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터라 외국어를 배우는 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적극 활용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독일에서 계속 살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당장 계획은 그렇다고 해도 아이의 '나중 일'은 모르는 거니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외국어 하나의 차이가 아이의 미래를 어떻게 바꿔놓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거니까, 훗날 아이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우린 무조건 독일어를 '열심히' 해보기로 결정!


수소문 끝에 영어로 독일어를 가르치는 독일 선생님을 구했다. 전문 강사인지라 시간당 수업료가 적지 않았지만 그만큼 경험치가 많으니 아이의 실력도 쑥쑥 올라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이는 1시간 반 수업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질 정도라며 독일어 수업을 좋아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던 수업을 두 번, 세 번 하고 싶다고 했다. 좋은 징조였다. 이렇게 6개월 지나면, 1년 지나면 엄청난 결과물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어쨰 아이의 수준은 독일어 딱 몇 달 공부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혀(아니 어쩌면 그 핑계로) 손 놓고 말았던 나의 실력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즈음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잘 가르치는 분 맞나? 아이는 수업을 좋아하는데 왜 실력은 제자리인가? 독일어가 원래 어려우니 좀 더 기다려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나?

그도 그럴 것이 수업이 끝난 뒤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각종 '만들기' 뒤끝의 잔재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시간 개념을 배우기 위해 종이와 연필 등을 이용해 직접 시계를 만든 뒤, 그걸로 수업을 진행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1시간 반 동안 고작 딱 교재의 두 페이지밖에 못 나가는 수업 진도도 한숨이 나왔다. 참다못해 나는 선생님에게 '지도 방식'에 대해 최대한 정중하게 '태클'을 걸었다. "아이가 선생님의 수업을 정말 좋아해요. 수업 시간을 늘리고 싶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1년 전보다 실력이 크게 늘어난 것 같지가 않아요. 진도를 조금 빨리 나가면 어떨까요. 숙제를 내주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나의 요청에 선생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공부는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루한 공부는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다음에 다시 독일에 올 기회가 있나요? 그때는 공립학교에 보내세요. 그러면 독일어가 금세 늘 거예요." 결과적으로 자신의 수업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음, '놀면서' 공부하는 독일 방식을 모르지 않지만, 그 방식이 참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매달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아니 그보다 독일 체류 기간이 점점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 생각하면 마냥 '놀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우리가 다시 독일에 온다는 계획도, 공립학교에 다닐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하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선생님과 함께 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선생님과 헤어지기 싫다며, 지금 너무나 만족한다며 극구 반대하는 아이를 설득, 그렇게 새로운 선생님과 새로운 방식으로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1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독일어를 가르쳐본 경험이 거의 없는, 영어가 가능한 독일 대학생이 아이의 새로운 선생님. 자신만의 수업 방식이랄 것도 없는 그녀와 가르치는 '방식'에 대해 상의하던 날, 나는 말했다. "남은 시간 동안 적어도 아이가 일상적인 회화는 가능한 수준이 되면 좋겠어요. 영어만큼은 안되더라도 독일어 책 읽기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면 좋겠고요. 그러면서도 독일어에 대한 거부감이 없도록 즐거운 수업이 되면 좋겠는데, 제가 너무 욕심이 많나요?"

논의 끝에 우리는 기존 사용하던 교재를 버리고 가벼운 책 읽기와 간단한 회화 및 어휘력 중심으로 일단 수업을 진행해보기로 했다. 중간중간 아이의 흥미도를 체크하면서 필요한 경우 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도 고민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이의 독일어 실력이 갑자기 선생님을 바꿨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독일어를 습득하는 방식에 있어 주기적으로 상의하고 체크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 게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전문 선생님이 아닌 터라 지난 몇 개월간 모든 수업 시간이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부족한 부분은 아이 스스로 주도적으로 찾아서 할 수 있게 됐고 나의 역할 또한 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더 효과적인 방식이 된 셈이다. 

물론 아이 스스로 독일어를 왜 열심히 해야 하는가에 대해 납득하게 된 것이 가장 주효했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점점 가까워오면서, 한국을 떠나기 싫어했던 그때처럼, 독일을 떠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아이에게 나는 말한다. "어떤 기회가 언제 너에게 주어질지 알 수 없어. 그러니 준비돼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지? 언어를 잘할 수 있는 경쟁력이란 진짜 어마어마한 거야. 독일어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기를 바라."


 



작가의 이전글 베를린 3년차, 인터뷰이로 만난 만9살 내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