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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씽킹 Jan 04. 2020

베를린 3년차, 인터뷰이로
만난 만9살 내 아이

1st_엄마도 잘 몰랐던 너란 아이,  너는 이토록 자라 있었구나

베를린에서 보내는 세 번째 연말이자 마지막 연말. '처음'이란 단어가 그러하듯 '마지막'이란 단어는 자꾸만 무언가에 더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다.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맞으면서부터 그 '마지막'이란 단어에 대한 집착이 시작되더니 12월로 들어서자 정리와 결산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혔다.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한 켠으론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 남은 시간들을 빈틈없이 잘 채워 보내기 위해 '점검'이 필요하다는 합리화를 해가며 지난 시간들을 다시 꺼내보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결산'하면 될 터지만 아이는 또 어떤지 궁금했다. 베를린에 정착하던 초장기에 비해 키도 생각도 훌쩍 자라 있는 아이를 때때로 자주 느끼며 살고 있지만, 실제로 아이는 베를린에서의 시간들을 어떻게 지나왔을지, 그 과정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지, 한국에 돌아갈 날짜가 더 가까워지는 지금은 또 어떤지 무수한 궁금증이 일었다. 


물론, 우리는 그에 대해 평소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남자아이답지 않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며 친구와의 관계 등 재잘재잘 잘도 수다를 떨어대는 아이인지라, 내 아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아이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건성으로 답하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가 다 그렇지 뭐.  

그러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지? 또래보다는 성숙했던 것 같은데.' 스스로의 기록을 잘도 쌓아놓는 사람들처럼, 어린 시절 쓰던 일기장들까지 차곡차곡 모아놓는 성격도 못 되는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그저 '짐작'으로만 회상할 뿐이었다.  

'내 아이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래서였다. 출발은 베를린 생활에 대한 정리 혹은 결산 성격이었지만, 지금의 내 아이를 내가 보는 방식이나 느끼는 대로가 아닌, 아이의 '생각'과 '내면' 그대로 기록해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내 아이의 성장 기록이 될 터였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을 잡지 기자로 살았던 경험에 비추어, 인터뷰란 방식이 아이 스스로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란 확신도 있었다. 좋은 인터뷰란 인터뷰이도 몰랐던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깨닫고 그리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으므로. 



12월 중순 아이에게 구두로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아이는 "그런 걸 왜 하는데? 어떤 걸 물어볼 건데?"라며 호기심 반 귀찮음 반 딱 그 정도 리액션을 보였지만 결과는 호기심이 이겼다. 아마도 본인이 교장선생님을 인터뷰해봤던 그 경험처럼 엄마가 학교 생활이나 좋아하는 취미, 음식 정도에 대해 물어볼 거라고 짐작하는 듯했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인터뷰에 응하는 인터뷰이는 최대한 솔직해야 한다는 것, '네, 아니오'의 단답형이 아닌 자신의 생각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 등 초보 인터뷰이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준 후, 12월 말 우리의 첫 번째 인터뷰가 성사됐다. 

주제는 '베를린에서의 2019년을 마무리짓는 소감'. 


Q. 2019년 한 해가 끝나고 있어. 한 해를 마치는 소감이 어때?

아주 좋았어. 2018 중반부터 2019년 초까지가 최고였어. 그때 친구도 많이 사귀고 플레이 데이트도 많이 했고 재밌는 여행도 많았거든. 


Q. 여행을 갈 때마다 안 좋아하더니 좋았구나?

응.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여행을 안 좋아하지. 한 곳에서 쉬면서 수영하고 그런 여행은 너무 좋았어. 


Q.2019년에 갔던 여행들은 다 기억이 나니?

최근에 갔던 런던, 리스본 여행 등은 더 잘 기억나지. 아, 하르츠도 갔었고 독일 남부랑 서부 여행도 기억난다. 아이제나흐, 에어푸르트, 바이마르 같은 독일 소도시들도 기억나.  


Q. 독일 소도시 여행과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건 다른 점이 있었어?

소도시 갈 때는 우리가 당일치기를 하거나 일박 정도만 짧게 여행했잖아. 그리고 한 번에 여러 군데를 간 적도 있었고. 그런데 나는 다른 나라에 갈 때가 더 좋았어. 


Q. 독일에 사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어? 여행은 다른 나라가 좋은 거야?

응, 사는 건 독일이 최고야. 


Q. 독일이 최고인 이유가 뭔데?

사람이 너무 많지 않잖아. 땅이 서울보다 그렇게 넓은 건 아니지만 인구가 더 적으니까 공간이 많아. 한국에는 사람들이 많잖아. 구체적으로 한국에 대한 어떤 시끌벅적한 기억은 없지만, 여기 와서 보니까 독일이 사람이 좀 적고 그래서 좋다는 생각이 들어. 


Q. 학교 생활은 어땠니? 3학년 시작하고 몇 달 지났는데. 

좋았어. 하지만 힘들 때가 있어. 1, 2학년에 비해 고학년이니까 할 일이 많지. 공부할 것도 많아졌어. 여러 가지 과목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필기체 쓰기야. 


Q. 힘든 건 뭐야?

어떤 경우에 내가 뒤처지는 게 있거든. 예를 들어 컬시브 라이팅(필기체 쓰기)의 경우는 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일주일 치가 늦어. 스튜던트 카운실 회의 때문에 수업을 빠지느라 그런 것도 있고, 다른 과목을 더 많이 하느라 밀린 것도 있어.  


** 아이는 3학년 초, 3~5학년 대상으로 운영되는 학생자치의회(스튜던트 카운실)에 학급 대표로 선발돼 활동 중이다. 한국의 '반장'과는 조금 다른 역할로, 아이는 그중에서 '스쿨 이벤트' 분과에 소속돼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 기획 및 실행 등을 하며 활동에 큰 보람과 기쁨을 느끼고 있다. 


Q. 스튜던트 카운실로 뽑혔을 때 어땠어? 

환상적이었어. 엄청 하고 싶었거든. 나한테는 독일에서 보내는 마지막 일 년이니까 지금이 아니면 못하는 거잖아. 그래서 꼭 하고 싶었어. 게다가 스튜던트 카운실 뽑는 날 스피치 마친 후 에미가 너무 긴장해서 울었거든. 나는 스피치 끝나고 나서 나도 뽑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에미가 우는 걸 보니까 너무 긴장됐었어. 


Q. 스피치 때 긴장했었어? 엄마는 너의 큰 탤런트 중 하나가 뭐든 크게 부담 같지 않고 도전하고 해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긴장됐지.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어려운 일들은 처음엔 못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언젠가 해결이 됐어. 나는 어려운 일에 부딪쳐도 언젠가 해결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 희망은 항상 있으니까. 모든 일은 수학 같아. 일이 생기면 먼저 해결전략을 세워야 해.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 일어나. 그리고 걱정을 해. 하지만 그다음엔 해결전략을 세우고 해결하기 시작하지. 그다음은 거의 다 풀었고 마지막은 해결해내는 거야. 이런 단계들을 거쳐..


Q. 그 단계 안에 해결이 안 되면?

일 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해결돼.  


Q. 그럼 가장 최근에 해결하기 힘들었던 일은 뭐야?

내 인생에서 그렇게 힘든 일은 없었어. 독일에 간다고 했을 때, 그게 가장 큰 힘든 거였는데 결국 좋아졌잖아. 지금은 한국에 돌아가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있긴 하지만 조금씩 해결되고 있는 중이야. 그래도 한국에 돌아가는 게 독일에 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로 느껴져. 독일에 올 때는 3년 뒤에 다시 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독일에 돌아오지 못하니까. 


Q. 독일에 계속 있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뭐야?

친구가 많잖아. 스테판, 자드, 디미트리어스, 미카, 오스카 등등 다 친한 친구들이야.   


Q. 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네?

2학년 때가 친구들이 최고였어. 1학년 때는 그렇게 좋진 않았어 1학년 때 친했던 아흐메드가 2학년 됐을 때 운동장에서 만났는데 내 이름을 물어본 적이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래도 1학년이 좋았던 건 미스 릴리(담임선생님) 때문이야.  


Q. 미스 릴리를 정말 특별하게 생각하는구나?

나한테 중요한 존재야. 1학년 때 내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고 관심 가져주고 그랬어. 처음 봤을 때부터 친절할 것 같다는 느낌이 왔어. 목소리부터가 부드러웠어. 부드러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하나는 원래 그런 부드러움이 있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지. 


Q. 네가 안 좋아하는 친구들의 성향은 어때?

나이스 하지 않아. 


Q. 매번 느끼지만 너는 '나이스 한 사람'을 중요한 기준으로 보는 것 같아. 나이스함의 기준이 뭐야?

카인드(Kind), 리스판서블(responsible), 그리고 리스펙트(respect)야. 판단력이 좋고 용감한 것도 포함되고. 


Q. 너는 나이스 한 사람이야?

그건 다른 사람들이 판단해야지. 하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이스함의 기준에 맞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 


Q. 스튜던트 카운실 활동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니?

스튜던트 카운실은 정말 할 일이 많아. 수업 빠질 때도 많고. 내가 좋아하는 수업을 빠지기도 해. 하지만 너무 재밌어. 지금은 내가 학교 생활 중에 가장 첫 번째로 두는 일이야. 학교를 위해 일하는 게 그 과정이 너무 즐거워. 준비하는 게 힘들 수도 있지만 재밌어. 처음엔 이렇게 해서 어떻게 이벤트를 해내나 싶었는데 노력하다 보니까 결국 해낼 수 있게 됐어. 


Q. 2년 넘는 독일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뭐야?

없는 것 같아. 잘 모르겠어. 음, 나는 해결하고 나면 거의 잊는 것 같아. 나쁜 일은 다 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라. 좋은 일만 기억하려고 해. 


Q. 내년에 이루고 싶은 꿈이나 계획은 뭐야?

그냥 계속 지금처럼만 좋으면 좋겠어!


Q. 끝으로 오늘 엄마랑 첫 번째 인터뷰를 마치는 소감이 어때?

재밌었어. 처음엔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재밌어. 인터뷰라는 게 뭔지 실감이 나지 않았었거든. 다음에는 내가 엄마를 인터뷰하고 싶어.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해. 


인터뷰 중간중간 나는 몇 번이나 아이의 대답을 곱씹으며 놀라고 또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의 내면은 훨씬 더 깊고 오묘했다. 누구보다 대화가 많았던 우리지만, 인터뷰를 빌어하는 이토록 깊은 대화는 아이와 나 사이를 더 밀도 있게 만들어준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번 인터뷰에서는 또 어떤 면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해보면서, 아이 말대로 언젠가 내가 인터뷰이로 아이 앞에 앉는 그날도 조만간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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