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짓는 법 (3) 신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다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뭘 다시 해보자는 건가. 나의 첫 현장은 김포의 한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이었다. 현장은 신도시가 아니라 주변에 아파트 단지들과 기반 시설이 잘 조성된, 어느 정도 개발된 도시에 있었다. 김포엔 안개가 심하게 끼는 날이 잦았다. 그곳에서 떠듬떠듬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간절하긴 했으나 뭘 하는 지도 모르고 현장에 갔고, 정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시공 기술은 그저 문자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도면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그리고 실제로 공사를 진행하는 협력업체에게 줄 건 바로바로 주면서 요구할 건 단호하게 요구하는 일머리였다. 그러니까 잠시도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면 안 되고, 조금은 우악스럽거나 아주 차가워야 했다. 그러면서도 어울릴 땐 서로가 없이는 못 살 것처럼 친분을 유지해야 했다. 다중인격이 되어야,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사수를 따라디니며 현장의 체질을 익혔다. 하지만 현장은 실습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경험 없는 햇병아리 건축기사의 티가 많이 났고, 나는 닳고 닳은 늑대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숙소 생활이란 걸 시작했다. 숙소는 현장의 컨테이너에서 먹고 자는 그런 열악한 공간을 생각하면 곤란하고, 근처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몇 명의 직원이 같이 생활하는 구조였다. 더러는 원룸을 얻어 생활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문제는 숙소에 소장님이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됐다. 체구가 큰 소장님은 ‘현장맨’다운 사람이었지만 직원들에겐 최대한 신사적으로 대했다. 그래도 신입사원에게 현장의 대장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게 하는 것은 좀 가혹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소장님의 술 사랑이었다.
민 기사, 나 왔다~
이런 톤과 멘트는 어릴 때 아빠가 월급날 통닭을 사들고 왔을 때 이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장을 (직접!) 봐온 소장님의 양손에는 각종 먹을 거리와 안주, 그리고 술이 있었다. 그때 소장님의 부드럽고도 의기양양한 표정은 월급날 아빠의 표정과 다를 게 없었다. (아빠 미안) 그렇게 느낀 이유는, 그가 정말로 직원을 아끼는 마음으로 술과 안주를 사왔기 때문이었고, 그 마음이 하나도 왜곡되지 않은 채 전달됐다. 본인은 기사 시절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어왔던 것이다. 아, 얼마나 자상한가! 그때 같이 살았던 과장님과 대리님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따져 물을 여유따윈 없었다. 그저 부지런히 술상을 차리고 부장급 인사와 대작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술판이 벌어지고 간신히 뒷정리를 한 후에야 귀신같이 다른 직원들이 숙소에 돌아왔다. 그들은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리고 과장일 수 있었던 것이다.
소장님은 술을 정말 좋아했다. 회식을 하면 3차는 거의 기본이었고, 어디 ‘7080 가라오케’ 같은 곳에서 몇 곡조를 뽑고 새벽 두, 세시가 되어야 마무리되곤 했다.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다음날 여섯시가 되면 (정말로) 귀신같이 현장에 나타나 채 가시지 않은 술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쩌면 이 사람들, 술기운에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몰라’. 비슷한 처지의 동기에게 하소연을 하니 이런 카톡을 받았다. 그래도 이런 문화는 사기업에 입사하며 충분히 각오했던 바였다. 참고로 나는 술을 잘 못 마신다.
아무튼 일 하는 법을 배우랴, 현장 생활에 적응하랴, 사람 상대하는 법을 터득하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꽤 좁았던 현장에서 토목공사가 잘 마무리되고, 어려운 파일 기초 공사를 무난히 넘기며 골조공사로 넘어가던 때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소장님으로부터 다른 현장으로 발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김포에 온 지 8개월 만이었다. 나중에 생각헸을 땐 좀 서운했지만, 나는 그때 꼬인 현장 생활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던 것 같다. 그래도 현장의 체질과 일하는 법을 몇 개월 익혔으니, 아직 개설되지도 않은 새로운 현장에서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왜 동탄에 가야 했을까? 꽤 많은 동기들이 있었는데도 왜 하필 나였을까? 현장의 개설되면 대부분 현장을 이끌 소장이 가장 먼저 결정된다. 그러니까 문제는 앞으로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될, 현장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혹하고 독불장군으로 회사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K소장님이 동탄 현장을 이끌기로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현장을 누빌 건축기사를 배치하는 데 본사에서는 꽤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K소장 밑에서 일했던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가장 깡이 쎼고, 회사를 나가지 않을 것 같은 인재를 동탄에 배치해야 했다. 그게 바로 나였다. 아주, 사람을 잘 본 것이다. 역시 대기업은 괜히 대기업이 아니었다.
추측컨대 다른 현장의 동기들도 검토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동기들이 일하는 현장에 제안이 갔을 수도 있다. 아마 다른 현장에서는 일 잘하는 직원을 빼주는 것이 싫었거나, 직원의 미래를 정말 걱정해서 발령 요청을 거부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됐든 김포 현장에서는 나의 발령을 수락했고, 일을 더 잘하고 경험 있는 직원의 확충을 보장받았을 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팀으로부터 트레이드나 방출 통보를 받은 운동 선수의 심정이 이러할까. 이 모든 생각에 씁쓸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짜피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후련하게 새로운 시작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다. 김포 소장님은 나의 환송식을 아주 성대하게 열어주셨고, 덕분에 술병으로 닷새를 앓아 눕고 나서야 화성시로 향할 수 있었다.
아직 개설되지 않아 근처 토목 현장의 남는 공간을 빌린 사무실에는 K소장님, 총무 부장님, 공무 과장님, 공사 차장님이 먼저 와 있었다. 처음 본 소장님의 인상은 소문과는 달랐다. (정치적인 성향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재명을 약간 닮았지만 인상은 부드러웠고, 무엇보다 직원들의 생활을 꾸리는 부분에 있어 굉장히 깔끔했다. 어쩔 수 없이 몇 주는 늘 저녁을 함께 먹었으나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술에 취해 다음 날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을 질색하는 분이었다. 또 숙소를 계약하기 전까지 어쩔 수 없이 근처에 모텔 생활을 해야 했는데, 적어도 두 명의 직원이 한 방을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무조건 1인 1실을 쓰게 해 퇴근 후의 사생활을 존중해주었다. 풍문으로 전해지던 말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