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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태형 Aug 18. 2022

이곳 둘레는
내 어린 시절과 닿아 있다

작아서 큰 세계 (2)

  어린이도서관은 조치원에 있었다. ‘조치원’은 세종특별자치시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아주 오래된 기차역이 있는 아담한 원도심이었다. 그땐 충남이었고 2012년 세종시에 편입되었다.

  세종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양극단을 맛볼 수 있는 도시이다. 골목이나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 교정을 마쳐 가지런한 치열을 자랑하는 듯한 신도심을 벗어나 20여 분쯤 차로 달리면, 전혀 다른 오래된 풍경이 펼쳐진다. 원도심(조치원)엔 골목이 있고, 낡음도 있으며, 할머니들 얼굴에 핀 주름엔 쌓이고 쌓인 태곳적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런 곳에 어린이도서관이라니. 정말이지 멋졌다.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계속 많아지고 있는 신도심에 비해 조치원은 점점 고령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적은 수라도 아이들은 존재한다. 원도심에 사는 아이들을 위해 세종시 최초의 어린이도서관이 조치원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러니 내 눈에 빨간 벽돌 옷을 입고 있는 어린이도서관은 그 위치에서부터 ‘이미’ 멋진 곳이라고 뽐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치원 둘레는 운명처럼 내 이런 시절과 닿아 있다.

  도서관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는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우리 엄마도 ‘국민학교’ 시절, 이곳의 졸업생이었다. 그러므로 이곳 조치원은 우리 엄마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 때 외할머니 댁과 이모 댁을 번갈아 가며 고복저수지와 복숭아 과수원 근처에서 사촌들과 놀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외할머니 댁과 이모 댁은 읍내를 벗어나 더 들어가야 있는 작은 동네에 있어서 먼지를 일으키는 버스를 타고 한참이나 들어가야 했다. 주말만 되면 코 묻은 돈을 들고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번화가로 나와 분식도 먹고 시장 구경도 했더랬다.

  낮엔 잘 놀다가도 밤만 되면 엄마가 그리워 울먹이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무슨 의식처럼 외할머니한테 간신히 이십 원을 얻어 들고,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면서 남동생 손을 꼭 잡고는 뜨거운 태양 아래의 길을 삼십 분이나 걸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하나 있는 슈퍼로 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 길을 걸을 때면, 남동생은 여름방학 땐 “누나, 해가 자꾸 우리만 쫓아와.”라고 했고, 겨울방학 땐 “누나, 바람이 자꾸 내 엉덩이를 밀어. 날아가겠어.”라고 했다.) 유일한 슈퍼엔 진한 주황색의 빛바랜 공중전화가 있었다. 나는 동생을 평상에 앉히고 청주 친가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의 집 전화번호를 난 아직도 기억한다.

  ‘따르릉따르릉.’

  한참 벨이 울린 뒤에야 할머니가, 어떨 땐 고모가, 어떨 땐 순덕이 이모가, 어떨 땐 막내삼촌이 전화를 받고 이어서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 혹은 가깝게 들린 뒤에야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늘 숨이 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혹시 이십 원어치의 시간이 다 되어 딸 목소리를 못 들을까 봐 헐레벌떡 뛰어왔을 것이다. 엄마는 늘 두 밤만 더 자면 데리러 올 거라고 했다. 그렇게 몇 번 통화를 하면 방학이 거의 끝나 있었다.

  12살 즈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셋째 이모 댁은 고복 저수지 근처에 있었다. 이모는 들깨, 고구마, 담배, 고추 등 소소하게 이 농사, 저 농사를 하셨는데 이모네 아이 넷은 수시로 농사에 동원되었다. 나와 동생 역시 이모 댁에 갈 때마다 밀린 숙제처럼 깨를 턴다든지, 담뱃잎을 묶는다든지, 고추를 딴다든지, 뭐든 하고 와야 했다. 날도 더운데 지청구까지 먹어 가며 일했다. 떨어지는 깨는 내 눈물 같았고, 작은 손으로 묶는 담뱃잎은 어쩌면 그렇게 바로 풀리는지 더위에 녹아내리는 내 마음 같았다. 그런데 내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복숭아 과수원 일이었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심했던 나는 과수원 노동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런 나를 사촌들은 부러움을 넘어 시기의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사촌들이 복숭아 과수원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때 나는 처마 그늘에 앉아 대야에 받은 물에 발을 담그고 신선놀음을 즐기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다른 날과 달리 이모가 혼자 남겨진 나를 위해 일거리를 주고 복숭아밭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막내 사촌이 꼬셔하는 눈빛으로 퇴장하고 나자, 잔치에 못 가고 남겨진 콩쥐가 된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노동’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일이었지만 그 시절엔 마냥 놀고만 싶을 때이지 않은가. 게다가 혼자 하는 일거리는 더욱 하기 싫은 법이다. 그리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보란 듯이 아파서 어린양을 부리고 싶었다. 우리 집에선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이렇게 방학 동안 시골에서 지낼 땐 왠지 사랑을 나눠 받는 것 같았다. 그러니 아픔으로 그 사랑과 관심을 좀 더 받아보고 싶은 욕심이 한편에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꾀를 냈다. 복숭아가 듬뿍 담긴 광주리로 가서는 팔뚝과 목에 보송보송 털이 난 복숭아를 벅벅 문질렀다. 그러고는 복숭아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향긋하고 끈적한 과즙이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엔 입 주변이 간지럽더니 팔뚝과 목도 차츰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화장실로 가서 벌겋게 부어오르는 입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왜 이랬지?’ 눈동자도 빨개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열도 올랐다. 찬물로 세수를 하면 좋아질까 싶어 앞머리가 흠뻑 적도록 세차게 세수를 했다. 목덜미도 팔도 열심히 닦았다. 그런데 간지러움은 가시지 않았고 어지럼증까지 더해졌다. 기운도 없어지고 감기 걸린 것처럼 목 안이 붓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이 나이에 이런 장난을 치다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졌다. 아주 크게 혼나도 좋으니, 빨리 두드러기가 가라앉길 기도했다. 그러고 있는 사이, 우르르 과수원에서 이모네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발소리를 듣자 갑자기 안심이 되어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급기야는 꺽꺽 소리까지 내며 아주 서럽게 울었다. 하지만 울먹이며 “이모, 내가…….”로 시작되는 변명은 길게 할 수 없었다. 온 몸을 사정없이 떠는 나를 본 이모가 기겁을 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내 바람대로 이모네 식구들의 걱정과 극진한 보살핌을 한 몸에 받았다. 식구가 많으니 곱절의 사랑을 받은 기분이었다. 큰 병원에 가서 약을 타온 이모부,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군말 없이 해 준 사촌동생, 투덜대면서도 밤에 화장실에 꼭 같이 가줬던 한 살 터울 작은언니, 아무 말 없이 웃으면서 밥도 먹여 주고 물도 먹여 줬던 큰언니, 내 웃음을 책임졌던 사촌오빠, 그리고 우리 이모. 밤새 꾸벅꾸벅 졸면서 내 곁을 지켰던 이모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런 소소하며 사사로운 추억이 깃든 곳에 다시 발을 디디니 마음이 새로워졌다. 어린 시절을 지냈던 곳에, 어른이 되어 다시 아이들을 만나러 오다니. 게다가 도서관 사서라는 일도 난생처음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나로서는 ‘새싹’처럼 여겨져, 이제 막 움트는 세상의 작은 것들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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