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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태형 Aug 18. 2022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아파트 짓는 법 (1) 프롤로그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윤수일(밴드)의 <아파트>는 명곡이다. 언제 들어도 심금을 울린다. 노래를 틀면 ‘띵동띵동, 띵동띵동띵동~’ 총 일곱 번의 초인종 소리가 격정적으로 울린 후 잠시의 적막이 따른다. 이후에 펼쳐지는 신디사이저 멜로디는 화려하면서도 이상하게 단출해서 갖가지 감정을 눌러 담는다. 1982년에 발표된 이 곡은 최신 주거 공간이었을 아파트로 향하는 도시의 정동과 부동산 개발을 둘러싼 당시의 열광을 품은 듯하지만,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꽤나 쓸쓸한 노래다. 언제나 ‘나’를 기다렸던, 사랑하는 ‘너’가 그 아파트에 더 이상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노래가 그리는 풍경이 과연 도시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독하다. 생각해보면 노래의 화자는 아파트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아마 다른 아파트를 소유한 세대주도 아닐 것이라는 게 나의 추측이다. (아니라면 이런 감정으로 아파트를 대할 수가 없다!) 상대는 왜 그 좋은 아파트를 두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머물지 못해’ 떠나버렸을까.

  나는 사랑을 몰라도 그 쓸쓸한 감정만큼은 알 것 같다. 막 개발이 시작된 신도시의 택지개발지구에는 도로와 다리, 그리고 땅을 구분하는 최소한의 경계만 있을 뿐 황량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갈대밭도 실제로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곧 화려한 도시가 될 그 고독한 풍경 속에서 이른 아침과 늦은 밤의 별빛을 바라보며 출퇴근을 반복했다. 그리고 (아직 지어지지 않은) 그 아파트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물론 없지만) 당연하게도 그곳은 내 집이 아니다. <아파트>는 모든 건축기사들의 처지와 마음을 대변해주는 노래가 될 운명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굴지의 건설회사에서 건축기사로 일했다. 몇 개의 현장을 거쳤지만 이 책은 지금은 최첨단 도시가 된 화성시 동탄 제2신도시에서의 일을 주로 다뤘다. 당시 동탄 제2신도시의 택지개발지구에는 100개가 넘는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언덕 위(힐OOOO)에 성채(OO캐슬)를 사랑으로(앗!) 짓고, 다가올 아름다운 미래(래OO)를 그리며 그들만의 편한세상(앗!)을 구축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뜻을 알 수 없는 이름의 아파트에겐 이 문장에 끼어들 틈이 없다. 복문으로 한 문단을 만들고 싶었는데 아쉽다) 이후에 펼쳐질 몇 가지 이야기들로 인해 나는 사회 초년기를 쓰고 진하게 보냈다. 선배들이 말하길 그 현장에서 소진된 공력이 다른 현장의 열 배는 될 것 같다기에, 3년의 시간은 30년 치의 에너지를 나에게서 앗아갔다. 많이 이르긴 하지만 사기업에서 은퇴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근속년수를 채웠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입사 4년 차에 나는 회사를 나왔다.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른 이유는 아무래도 끊임 없이 이어지는 아파트 중대 하자와 사고를 뉴스에서 접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파트 건축은 ‘마감빨'이다. 몇 가지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보인다거나, 미관상 누가 봐도 눈쌀이 찌푸려진다거나, 기능적인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전혀 상관이 없다. 집이 중간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는 게 더 낫다. 무엇보다 아파트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다만 마감재가 씌워지기까지 집 구석구석에 온갖 구조적 문제와 이해관계, 관습, 역사, 욕망, 애환이 뒤섞여있다는 사실만 인지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들 중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과잉이거나 부족하다면, 그것들이 물성화된 아파트는 하자로서 문제를 드러내고 품질은 곤두박질 쳐진다.

  앞으로 펼쳐질 몇 가지 이야기들은 이 구조적 문제와 이해관계, 문화, 습성, 욕망과 애환에 대한 것이다. 몰라도 될 이러한 요소들이 점점 더 짧은 주기로 균형을 잃어가고, 누군가는 큰 불편을 겪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한 궁금증을 갖는다. 도대체 왜 누수는 발생하는 것이며, 세대에서 분뇨는 왜 발견되는 것이며, 도대체 왜 집이 무너졌을까? 시공사의 부실시공이라고 말하고 넘어가는 것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부실시공을 하고 싶어서 하는 회사가 어디 있을까. 그러니까 그들이 왜 부실시공을 하게 되었는지, 혹은 할 수밖에 없었는 지를 따져보면 이 세계를 구축하는 요소들이 어렴풋이 보이게 된다.

  다만 이 글은 거대한 사회학 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게 털리고, 시멘트 바닥에서 문자 그대로 뒹굴던 내 개인의 이야기이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가 일하는 방식이나 나의 선택, 그리고 이 글이 세대의 현상으로 비춰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한국 건설업계가 과거부터 작동해온 방식, 그리고 나와 무관할 것 같았던 당시의 정치 사회적 구조가 나의 일에,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현장에서 개처럼 뛰어다녔던 이유는 (일을 못했던 탓도 있지만) 내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불거졌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다른 시기에 건축기사로서 일을 시작했다면, 지금도 그 일을 계속 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그저 경험에 빗대어 나에게 벌어졌던 일을 이해했으니, 그것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면들 중 하나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니 노파심에 밝히지만, 이 이야기는 단 하나의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각각의 건설 현장은 같은 회사 내에서도 판이하게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주로 그것은 현장의 최고봉인 소장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현장에 모인 사람들의 경력이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소장의 경우 한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현장의 문화가 회사의 기조와도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벌어진 일들이 모든 현장에서 반복된다고 말할 수 없고, 다른 현장에서는 더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다. 만약 한국의 건축기사들을 모아놓고 각자의 고생담을 펼쳐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남자들이 서로 군대 얘기를 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양태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고생들의 뿌리와 본질은 비슷하다.


(사진 : 윤수일 밴드 2집 앨범 커버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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