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 보이지 않는 인구 조절 장치
15세기 후반, 유럽은 거대한 압력솥과도 같았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감한 후 다시 급속히 회복되면서, 한정된 토지와 기회 속에서도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장자 상속제로 땅을 물려받지 못한 차남 이하 아들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토지를 둘러싼 분쟁과 종교·사회적 갈등이 들끓었다.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이 인구 폭발과 사회 불만의 압력을 한순간에 해소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럽 밖에서 찾아온 '신대륙'이라는 공간이었다. 신대륙의 발견은 단순한 지리적 확장이 아니라, 유럽 사회 구조에 숨겨진 안전통로이자 보이지 않는 인구 조절 장치로 작동했다. 마치 증기가 빠져나갈 밸브를 얻은 압력솥처럼, 유럽은 외부로 팽창할 공간을 통해 내부의 폭발을 피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신대륙이 역사 속에서 수행한 이 독특한 '기능'에 주목하여, 유럽 사회의 구조적 위기가 어떻게 신대륙을 통해 완화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공간의 유무가 역사 전체를 어떻게 재편했는지 통찰해 보고, 오늘날 우리 현실을 비추어볼 단서를 찾아볼 것이다.
중세 말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는 유럽의 장자 상속제는 토지와 부의 승계를 장남에게 집중시켰다. 겉보기에는 가문의 힘을 유지하기 위한 합리적 제도였지만, 그 이면에선 차남 이하 아들들은 사회적 좌절이라는 부작용이 쌓여갔다. 땅 한 평 물려받지 못한 이들은 기사나 성직자가 되거나 용병으로 전장을 떠돌거나 혹은 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스페인 정복자들(conquistador) 가운데 상당수가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둘째 아들들이었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전쟁과 정복을 통해 운명을 개척하려 했던 것이다. 영국에서도 17~18세기에 많은 젊은 귀족의 차남들이 아메리카 버지니아 식민지 등으로 떠나 정착했다. 영국 초기 식민지인 버지니아의 대농장주 상당수가 이러한 무일푼으로 신대륙에 건너간 젠트리의 차남들이었고, 이들은 훗날 미국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결국 장자 상속제가 만든 구조적 한계는 신대륙이라는 출구를 통해 일부 해소되었다. 유럽에 남았다면 사회 불만 세력이 되었을 사람들이 외부로 눈을 돌려 새로운 기회를 찾은 것이다.
한편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으로 대표되는 토지 사유화 물결은 농촌 공동체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16세기 이후 지주들은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농민들의 토지를 병합해 대농장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수세기동안 유지되어 온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는 결국 해체되고, 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18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인클로저로 영국에서만 1832년경에는 중세 농민 공동체가 거의 파괴되었고,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가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부랑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 중에는 먹고살 길을 찾아 신대륙으로 눈을 돌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영국 농촌 인구는 19세기 후반 절대적으로 감소하여 1841~1911년 사이 400만 명 이상이 농촌을 떠났는데, 이 중 상당수는 도시로 가는 대신에 대서양을 건넜다. 산업화의 그늘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들과 토지 없는 농민들은 아메리카로 향하는 이민선에 몸을 실으며 새로운 삶을 도모했다. 유럽 각국 정부와 지식인들도 인클로저와 산업화가 빚은 실업 문제의 해법으로 해외 이민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차라리 잉여 인구를 밖으로 내보내자"는 인식이 퍼져나갔고, 실제로 19세기 영국에서는 정부가 실업자들의 식민지 이주를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내부에 남아 잠재적 사회 불안 요인이 될 뻔한 인구가 신대륙 이민이라는 통로를 통해 배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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