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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역사적 원인

흑사병과 팽창하는 유럽

by 블루프린터

4장. 역사적 원인: 흑사병과 팽창하는 유럽


앞서 3장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세대 갈등의 이면에 '압력솥 사회'라는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제 질문을 과거로 돌려, 이러한 압력솥과 같은 현상이 역사적으로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지 찾아볼 차례이다. 중세 말 유럽 사회를 살펴보면, 흑사병으로 한때 급감했던 인구가 재차 팽창하며 한정된 토지에 압력이 높아졌고, 운 좋게도 신대륙의 출현으로 내부 갈등을 외부로 분산시킨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15세기 유럽과 21세기 한국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외부로 팽창할 신대륙이 있었던 사회와 없는 사회의 극명한 대비가 드러난다. 이를 통해 현재 우리의 압력솥이 단순히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역사적·구조적 필연의 결과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흑사병 이후 인구 변화: 급감과 급증의 반복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흑사병(Black Death)은 유례없는 인구 재앙이었다. 불과 몇 년 만에 유럽 인구의 30~50%가 목숨을 잃었으며, 서유럽 인구는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 1348년 약 480만 명이던 인구가 1351년 260만 명으로 줄어들어 46% 감소했고, 추가 유행으로 1450년경에는 불과 190만 명(1348년 대비 60% 감소)까지 떨어졌다. 유럽 전체로 보면 1350년경 약 7천4백만 명이던 인구가 1400년경 5천2백만 명 수준으로 30%나 감소했다. 흑사병은 인류 사회를 송두리째 흔든 일대 충격 요인으로, "사람만 사라졌을 뿐 토지와 자원은 그대로였기에, 인구가 절반이 되면서 남겨진 나머지 절반이 모든 것을 배로 차지하게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는 일시적이지만 평균 부존자원의 증가를 가져와, 살아남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고 토지에 여유가 생기는 등 사회·경제구조에 변화를 주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흑사병이 봉건 질서의 균열과 새로운 사회 변혁의 촉매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 절벽"은 영구적이지 않았다. 15세기에 들어 흑사병의 충격이 서서히 완화되면서 유럽 인구는 다시 증가세로 전환했다. 1400년 약 5천2백만 명에서 1500년경 6천7백만 명으로 30% 가까이 증가했고, 연평균 약 0.25%의 성장률을 보였다. 16세기에도 인구 증가는 가속되어 1600년경 약 8천9백만 명으로 중세 최고치(1340년경 약 7천4백만 명)를 뛰어넘었다. 즉 약 250년 만에 인구가 완전히 회복되고도 남을 만큼 증가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 유럽 인구 구조를 두고 “V자형 회복 곡선”에 비유하는데, 흑사병으로 급락한 뒤 15~16세기에 완만한 상승, 17세기에는 정체되는 형태였다.

15세기말이 되자 유럽 사회 곳곳에서 인구 과밀과 자원 부족에 대한 우려가 다시 나타났다. 사실 흑사병 이전인 14세기 초에도 유럽은 "몰트루스적 함정"에 빠져 있었는데, 경작 가능한 모든 토지를 개간해도 인구를 먹여 살리기 벅찰 만큼 생산력의 한계에 도달했었다. 몰트루스적 함정(Malthusian Trap)은 경제학 이론에서 인구 증가가 식량 생산 증가를 따라잡아 인구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증가하면 1인당 실질 소득이 오히려 줄어들며, 결국 생존 가능한 인구 수준에 맞춰 인구가 다시 감소한다는 Thomas Malthus의 이론을 말한다. 즉, 기술 발전이나 생산성 증가로 일시적인 번영이 나타나도 인구가 그 이득을 흡수해 결국 빈곤 상태로 되돌아가는 역사적 악순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흑사병은 그 함정을 일시적으로 해소시켰지만, 150년 후 인구가 회복되면서 유럽은 다시 한계에 직면했다. 15세기 후반부터 곳곳에서 토지 부족과 식량 압박이 가중되었고, “과잉 인구”에 대한 불만과 위기감이 자료에서 포착된다. 예를 들면, 잉글랜드의 농촌에는 예전에 버려졌던 변방 농지가 다시 경작될 정도였고, 작황 부진 시에는 곧 기근과 소요가 뒤따라 왔다. “유럽은 1340년에 이미 한계점에 도달했었고, 1600년 다시 그 벽에 부딪혔다”는 평가는 이 맥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급감에 의해 잉여 자원이 증가하게 되고 결국 인구 회복과 압력이 재발생하게 되는 사이클을 거치며, 15~16세기 유럽은 다시 한번 팽창적 긴장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제 문제는 유한한 토지였다. 인구는 늘었지만 땅은 늘지 않았기에, 한정된 국토 내에서 사람들 간 생존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농민부터 기사 계층까지, 모두가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애써야 했다. 이때 등장한 해법 중 하나가 바로 바다 건너 새로운 땅을 찾는 것, 즉 이주를 통한 팽창의 모색이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유럽 내부 사회경제 구조 자체가 어떻게 압력을 키웠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토지 상속과 농촌 사회의 재편: 장자상속과 공유지의 종말


인구가 회복되면서 가장 먼저 압박이 커진 것은 토지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토지가 부와 권력의 근원으로 한정된 자산이었기에, 상속 제도가 사회 구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14~15세기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서는 장자상속제(primogeniture)가 정착되어 있었는데, 이는 가문의 토지와 재산을 오로지 맏아들 하나에게만 물려주는 제도였다. 가족 내 재산 분할을 막아 영지를 유지하려는 귀족들의 이해와, 봉건 영주들이 봉토의 분할로 인한 권력 약화를 우려하여 권장한 관행이었다. 그 결과, 귀족이나 지주 계층의 맏아들은 부모의 사후 막대한 토지를 물려받아 부와 지위를 누렸지만, 차남 이하 아들들은 거의 아무런 유산 없이 사회로 내던져지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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