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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우리가 발견해야 할 또 하나의신대륙

'어디에' 살지를 넘어 '어떻게' 살 것인가

by 블루프린터

9장에서 우리는 ‘신대륙 없는 나라’의 구조적 해법으로서 토지 공개념을 재해석하고, ‘임대형 택지공급’이라는 담대한 제도적 전환을 제안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거대한 청사진이다. 국가 시스템이라는 하드웨어를 통째로 바꾸는 것과 같은, 어렵고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만약 내일 아침, 기적처럼 정부가 이 모든 제안을 받아들여 서울의 모든 공공택지를 임대형으로만 공급한다고 발표했다고 상상해보자. 과연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영끌’과 ‘빚투’의 고통이 사라지고, 모두가 행복한 주거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규칙 안에서 또 다른 경쟁과 서열화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어느 단지의 토지임대료가 더 싼지, 어느 건물의 커뮤니티 시설이 더 좋은지를 비교하며 새로운 ‘급지’를 나누려 할 것이다. 심지어 건물 자체에 막대한 웃돈(프리미엄)을 붙여 거래하며, 토지가 아닌 건물을 새로운 투기의 대상으로 삼으려 할지도 모른다. 이는 제도의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대한 하드웨어의 교체는 반드시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들, 즉 시민들의 생각과 가치관이라는 소프트웨어의 업데이트와 함께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국가와 정책의 역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로 우리 자신, 시민 사회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해 온 질문은 단 하나였다. “어디 사세요?” 이 질문 속에는 단순히 사는 곳을 묻는 의미를 넘어,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 심지어는 삶의 수준까지 판단하려는 무의식이 섬뜩할 정도로 깊게 깔려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 질문의 폭력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디에(Where)’ 사는가의 문제를 넘어, ‘어떻게(How)’ 살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시민적 상상력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제도라는 새로운 대륙에 따뜻한 생명력을 불어넣을 유일한 길이다.


‘어디’라는 주소의 폭력: 내 집은 스펙인가, 삶의 공간인가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특히 수도권에서 ‘아파트’는 더 이상 단순한 집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과 가족의 사회경제적 좌표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스펙(spec)’이 되었다. 우리는 집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대학 원서를 쓰거나 입사 지원서를 내듯, 수많은 조건이 나열된 스펙 리스트를 훑으며 저울질한다.

그 첫 번째 항목은 단연 ‘학군’이다. 특정 학군에 속하기 위해 무리한 대출을 감수하고 이사를 가는 ‘맹모(孟母)’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를 품고 있다는 의미의 ‘초품아’라는 신조어는 학군이 부동산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자녀의 교육이 집값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면서, 우리 사회는 교육과 부동산을 한 몸으로 묶어버리는 기이한 시스템을 완성했다. 아이들의 미래가 곧 내 집의 자산 가치 상승률과 직결되는 이 구조 속에서, 교육은 인간의 성장을 돕는 본연의 가치를 잃고 부동산의 종속 변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두 번째 항목은 ‘브랜드’다. 어느 건설사가 지었는가에 따라 아파트의 등급이 나뉘고, 같은 동네에서도 브랜드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낸다. 건설사들은 ‘프리미엄 라이프’ 같은 구호를 내세우며 아파트가 아닌 이미지를 판매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어느 동네’에 산다고 말하지 않고, ‘어느 아파트’에 산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기보다, 특정 브랜드가 제공하는 상품의 소비자로서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다.

세 번째 항목은 끝없이 진화하는 ‘편의시설’이다. 헬스장과 독서실은 기본이 된 지 오래고, 이제는 실내 수영장, 골프 연습장, 조식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이 화려한 시설들은 입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순기능도 있지만, 동시에 아파트를 외부와는 격리된 성채로 만들고, ‘우리 단지’와 ‘그렇지 않은 단지’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된다. 단지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면서, 입주민들은 단지 밖의 동네 상권이나 지역 사회와는 점점 더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 편리함의 대가로 우리는 공동체의 더 넓은 연대감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항목을 관통하는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항목, 그것은 바로 ‘자산 가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어떤지, 이웃과 얼마나 교류할 수 있는지,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 공간이 있는지와 같은 삶의 본질적인 가치들은 ‘이 집이 얼마나 오를 것인가’라는 냉엄한 질문 앞에서 힘을 잃는다. 인터넷 부동산 커뮤니티에서는 우리 아파트의 시세를 어떻게 방어하고 끌어올릴 것인가를 논의하는 글들이 넘쳐난다. 이웃과 담합하여 매물 가격(호가)을 높게 유지하고, 아파트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소식은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행위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이성적으로는 이것이 시장을 왜곡하는 비합리적인 행동임을 알면서도, 내 자산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불안감 속에서 너도나도 이 ‘집단행동’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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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금융의 숫자를 읽고, AI로 데이터를 분석하며, 심리학으로 사람의 마음을 탐구합니다. 데이터와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견한 인사이트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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