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레포 잔고 0, '진짜 공포'가 시작되는 이유

시장의 '안전 쿠션'이 사라졌습니다. 진짜 유동성 위기가 올까요?

by 블루프린터

우리의 일상 속 '안전장치'라는 것은, 그것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을 때는 그 존재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자동차의 에어백이나 건물의 비상구처럼 말이죠. 그것이 사라졌거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중요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금 금융 시장이 딱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최근 뉴스 피드를 채우는 '역레포(RRP) 잔고 0'라는 헤드라인이 바로 그 사라진 안전장치에 대한 경고입니다. 평소에는 전문가들의 영역이라며 넘겼을 이 낯선 용어가, 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신호가 되는 것일까요.


이 복잡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거대한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Fed)을 '은행들의 본사'라 하고, 우리가 아는 일반 은행들을 '동네 지점'이라고 상상해 보죠. '지점'은 고객이 언제든 돈을 찾으러 올 때를 대비해 '금고(지급준비금)'에 항상 비상금을 채워 두어야 합니다. 이 금고가 비면, 우리는 그걸 '위기'라고 부릅니다.


그동안 '본사(연준)'는 물가를 잡겠다며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이는 '양적긴축(QT)'을 진행해왔습니다. 거대한 진공청소기로 돈을 빨아들이는 것과 같죠. 당연히 '지점(은행)'들의 '금고'는 비어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동안, 시장은 놀라울 정도로 잠잠했습니다. 진공청소기가 분명 돌아가고 있는데도, 은행들의 '금고'는 꽤 넉넉해 보였거든요.


비밀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은행의 '금고'와는 별개로, 다른 금융 기관들이 남아도는 현금을 임시로 쌓아두는 '초단기 파킹통장'이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역레포(RRP)'입니다.


지난 1~2년간 연준의 진공청소기가 빨아들인 돈은, 은행 '금고'의 돈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파킹통장'에 쌓여있던 잉여 자금들이었죠. 시장의 충격을 묵묵히 흡수해 주던 거대한 '쿠션'이었던 셈입니다.


아, 그런데. 그 쿠션이 마침내 모두 닳아 사라졌습니다. '파킹통장'이 텅 비어버린 겁니다.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쿠션이 사라진 지금, 연준이 진공청소기를 한 번 더 돌린다면(QT를 계속한다면), 그 타격은 고스란히, 그리고 직접적으로 은행의 '금고'를 향하게 됩니다.


"작년에 SVB 은행도 망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때와 지금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이 더 위험한 구조일 수 있습니다.


SVB 사태는, '파킹통장(쿠션)'은 넉넉했지만 특정 '지점' 하나가 자산 관리를 잘못해 제 '금고'가 먼저 터져버린, 어찌 보면 개별적인 '사고'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요? '쿠션' 자체가 사라져버린 탓에, 시스템 전체가 충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입니다. 이제 작은 충격에도 모든 은행의 '금고'가 동시에 흔들릴 수 있는 살얼음판 위에 서게 된 것이죠.


연준은 이제 혹독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물가를 잡기 위해 QT(긴축)를 계속하며 시스템 전체의 위기를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돈을 풀고(QT 중단), 잡히지 않은 인플레이션을 용인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그 끝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거대한 줄타기의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모펀드'라는 이름의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