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활동이 많은 아이들이 있다. 방과 후 활동도 있고, 매일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독서 시간이나 독서 수업 참여가 적은 편이다. 그래도 방학이 되면 그 친구들에게도 독서 시간이 주어지곤 했다. 추천 도서를 모으고, 학년별 책을 따로 전시하고, 도서관에서 3개월에 한 번씩 보내주는 100권의 책들 중에서 골라 다시 전시해 주었다. 3개월 동안 읽고 다시 바꾸는, 아주 좋은 시스템이었다. 그런데도 별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보기 어려운 친구가 있었는데 나와 대화를 나눌 일도 거의 없어서 어색한 사이라고 해야 할까. 내적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은, 얼굴만 아는 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아이는 가끔 주어지는 독서 시간에도 책을 펼치기보다는 친구와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물어보았다.
"민아야, 너는 책 왜 안 보고 있어? 책이 섭섭하대."
"아니에요. 책도 저 안 좋아해요."
민아의 표정은 진심인 듯,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나도 책이 싫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책이 잘못했네'하고 넘길 수는 없었다. 책을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책이 자기를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아이. 이럴 땐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어려운 책을 읽었나? 재미있는 책이 없었나? 뭘 골라 줘야 하지? 머릿속에 물음표들이 가득 돌아다녔다.
우선 초등학교 4학년 민아의 학습을 도와주시는 선생님께 의견을 들어보았다. 학습에서 모르는 것이 많고, 지문을 읽거나 문제를 파악할 때 이해를 잘 못한다고 했다. 정답을 맞히기 어려워하고, 틀린 문제를 고칠 때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했다. 독서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은 국어 학습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민아는 문해력이 부족해서 단어의 뜻이나 질문의 의도,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고 친구들에게 인기 많은 아이. 고학년이 될수록 보는 눈도 높아지고 시시한 것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책도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쉬워 보이면 유치해서 싫고, 글이 많으면 재미없어서 싫고, 그러다 보니 읽을 책이 없는 상태. 그리고 스마트폰. 짧고 빠르고 재미있는 화면에 익숙한 아이에게 천천히 읽어야 재미있어지는 책은 늘 경쟁에서 지는 것처럼 보였다. 일정이 바쁜 아이들은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아하는 책 한 권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아무 책도 읽어 보지 않아서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 아이에게서 가까운 것들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노래와 아이돌
좋아하는 옷 스타일
좋아하는 게임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친구 등
민아는 수영을 좋아했고, 아이돌 음악도 좋아했고, 심플하고 깔끔한 스타일을 좋아했다. 가방에 인형을 여러 개 달고 다녔지만 귀여운 것보다는 단순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존재감은 확실한 아이. 이런 아이에게 어떤 책이 좋을까.
추천해 준 책은『고양이 깜냥』 시리즈였다.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해서 골랐다. 길이도 짧고, 내용도 어렵지 않았다. 재미없으면 다른 책도 같이 찾아보자고 하고 우선 1권만 다 읽고 알려 달라고 했다. 민아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그리 자신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바쁜 일정.
그때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책을 찾아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책이 재미없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책이 어려운 게 아니라 책과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물이 무서운 아이에게 바로 수영을 시킬 수 없는 것처럼, 책이 어려운 아이에게 바로 독서를 좋아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책을 바꾸는 것 말고 책을 만나는 자리를 바꿔 보기로 했다.
복도 끝 창가에 작은 자리를 만들어 보았다.
'창가 독서'
이곳에서는 책 읽는 친구들만 올 수 있다.
세 명만 앉을 수 있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조용히 읽는다.
카페처럼
혼자 있어도 괜찮은 자리.
생각보다 지원자가 많았다. 요일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창가 독서가 시작되었다.
바쁜 민아에게도 말했다.
"시간 되면 창가에서 책 읽어 볼래?"
"다음엔 같이 책도 골라 보자."
책이 나를 안 좋아한다고 말하던 아이가 언젠가 책장을 넘기며 웃는 날이 올까. 수영을 못 하던 아이가 어느 날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듯, 책이 어려운 아이도 언젠가는 책의 바다에서 자기 속도로 헤엄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책을 고르고 자리를 만들고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