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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곰 Aug 31. 2021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재능과 의지라는 유구한 거짓말 앞에서

1.

 자기소개서에 쓰이는 관용어구 중에서 가장 실없는 소리를 하나 꼽자면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가 아닐까 싶다. 사실이긴 사실인데, 무미건조한 이 레퍼토리에 걸맞은 나는 정말 어릴 때부터 글을 썼다. 사실 좋아했다기보단 ‘어릴 때부터 글쓰기로 회피했습니다’가 좀 더 적절할 것이다.


 세상에 처음부터 쓰기를 좋아할 어린이가 어디 있겠는가. 3학년 때 억지로 하루 한 편씩 일기를 썼던 게 나한테는 큰 자극제였으리라고 어렴풋이 짐작한다.


 꾸준함은 소중하다. 하루 한 편씩 자기 수준에서 글을 쓰는 것은 어른이나 어린이나 힘든 건 매한가지였을 텐데, 어떻게든 선생님께 혼나지 않으려고 썼던 글들이 나중에는 숨통이 되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순간에 놓일 때 글과 언어와 공책만큼은 내 곁이 되어 남았다.


 커서 글을 쓰며 지냈으면 좋겠다, 하던 마음이 이렇게 대학원에서 논문을 씀으로써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정확히는 이루어질 가능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글쓰기일 줄은 몰랐지.


 아니, 정말 몰랐던가? 예술을 전공하는, 문학을 전공하는 다른 이들에 비해 내 문장은 보잘것 없이 딱딱하고 단출하다. 능력 있는 문학예술인(이라고 쓰고 팬픽러라고 불리는 중학생들) 사이에서 어린 나는 퍽 좌절했다. 첫 좌절을 작문 시간도 아닌 중학교 1학년 첫 미술 시간 때 느꼈으니 아이러니하다. 나는 이렇게, 요렇게, 저렇게 그려내고 싶은데 왜 내 손은 따라주질 않는지!


못생긴 원숭이 기간(a.k.a. 개춘기)을 천천히 쌓아가며 지냈다면 언젠가 문득 표현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걸 발견했을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의 인내심이나 열정이 있지는 않았다. 빠른 포기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애매한 재능은 고통일 뿐이라는 말도 있듯이, 문학적으로 내 이야기를 풀어내기엔 내 글쓰기 솜씨는 분명 천부적인 재능은 아니었다.

마일로 작가님의 강아지 솜이의 원숭이 시절. 뭘 하든 못나보여도 지나고 나면 다 필요한 과정. 출처 @polarsom

 어쩔 수 없지, 뭐. 어릴 적부터 미술과 예술에 자주 노출되던 환경은 아니었으니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일 거라고 되내며 조용히 체념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식하게 공부하는 것뿐이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공부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유구한 거짓말을 믿었다. 일부는 맞는 말이었다. omr카드에 답안을 채우는 일은 예쁘게 채우지 않고서도 답은 답이었으니. 그리고 나는 의외로 답을 맞히는 데에 꽤 재능이 있었다.



2.

 딱 한 번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재능?’ 싶은 순간이 있었다. 우리 중학교에는 사격부가 있었다. 그 해 입학한 신입생은 첫 체육시간에 사격 체험을 하게 된다. 1학년이었던 나도 친구들 뒤를 쫓아 번호순으로 서서  졸졸 따라갔다. 그때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체육 시간에 사격을 더 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오로지 뽑을 만한 선수 후보가 있는지 가려내는 시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놀랍게도 몇 발의 사격에서 전부 10점을 맞힌 나에게 사격부 코치는 ‘사격 한 번 해볼래?’하고 지나가듯 이야기했다.


 거기서 내가 반응을 보였으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아니! 오로지 공부뿐인 우리 지 여사는 반대하셨을 게 뻔하다. 그 놀랍고도 우연한 사격 실력은 이미 어딘가 저편으로 사라졌다. 어쩌다 사격 비스무리한 게임을 하면 내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이 짧은 일화는 추억하기 좋은 형태로 내 마음에 남아 종종 즐거움을 준다. 조선시대에 컴퓨팅 사고력이 뛰어난 채 태어난 사람은 어떨까, 하고 종종 상상하곤 한다.



3.

  영재의 특성으로는 뛰어난 능력과 창의력 외에도 꾸준한 과제집착력을 든다.


서울영재교육에서 소개하는 영재의 특성(Renzulli).


 영재는 이제는 한물 간 학문의 영역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영재와 천부적인 재능을 동경한다.


 학생 때, 자기는 머리가 좋다며 공부를 성실히 하지 않던 친구가 있었다. 어쩌다 그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걔 진짜 머리 좋더라’라는 칭찬이 나오면 못난 나는 배알이 뒤틀렸다. 머리는 쟤만큼 비슷하게 좋은 것 같은데, 하는 이상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 그 이상 그 이하의 평가도 받지 못했던 나는 어쩌면 ‘얘는 머리도 좋은데 열심히 하기까지’라는 두 가지 인정이 함께 따라주길 바랐던 것 같다. 머리가 좋은 건 타고난 운, 마치 로또 당첨 같은 일이지만 노력하는 일은 좀 더 지지부진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다고 믿은 탓이다. 능력주의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후자가 뒤따라야 하는 거라고, 그게 충분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 친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그 아이는 영재가 아니라고 되뇌었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라는 다소 철학적인 질문 앞에서 능력주의를 맹신하던 나를 돌아본다. 내가 노력할 수 있도록 뒷받침된 환경은 온전한 내 의지가 아니다. 모르모트 쥐에게 한 갈래의 길밖에 없는―결국 탈출하게 되어있는 미로를 주었을 때, 그리고 마침내 탈출했을 때 쥐는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나는 내가 한 마리의 쥐에 지나지 않음을 비로소 짐작한다. 허무주의에 빠져 하루하루 버티는 나날은 다행히 지났다. 여전히 ‘전부 운빨로 바꿔!’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나를 꾸준히 설득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유의지를 믿으며 간신히 희망한다. 아마 내 앞에 주어진 미로는 내가 적당히 포기하지 않을 수준의 미로일 테지만, 미로 한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았던 쥐의 고민과 시간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뚜렷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증명할 목적 없이 써 내려갔던 일기가 이를 증명할 것이다.

제목부터 너무 좋아서 홀린 듯 읽은 김영민의 동양철학 에세이. 정말... 김영민이란 무엇인가.


4.

 삶에서 내가 바꿀 수 없는 요인이 너무 많아 절망스러운 한편, 그래도 인간 의지는 여전히 투박하고 소중하다. 인간의 꾸준함은 적어도 의지에 의해 길러질 수 있는 변인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천천히, 점진적으로. 그렇게 발전할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 지금의 나를 더 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처음부터 글쓰기를 좋아한 건 아니었습니다.’라며, 뻔한 문장 다음을 다시 한번 뻔하게 연결 짓는 일. 그리고 문장을 잇는 일을 반복하여 초고를 한 편 써내는 일이 나는 미로 속의 쥐로서 할 수 있는 여남은 발버둥이라 여긴다.

 3의 친구가 행복하게 지금을 살고 있길 바란다.


+

 열두 살 아이들과 열두 달을 지내길 3년, 나는 매해 그렇듯 올해도 아이들에게 내 열두 살 적 일기를 공개했다. 오타쿠 감성의 딥 다크(...) 일기장 몇 권이 학급문고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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