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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곰 Sep 01. 2021

살아갈 힘이 주는 쓸쓸함

<오세암>을 읽고

 <오세암>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본 어린이 세대로서, 부끄럽지만 처음 애니메이션을 보았을 때 잘 이해가 가지 않았음을 밝힌다. ‘왜 갑자기?’ 플롯 진행을 따라가기엔 내가 너무 어렸는지, 그 슬프다는 결말을 보고 “그래서 길손이가 산거야, 죽은 거야?” 정도의 얄팍한 감상만을 남겼다. 어린 나에게는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결말의 함축성, 그 선명한 위화감을 기억한다.


오세암 애니메이션 결말: https://youtu.be/w6w9jWfCl7c     


 시간이 지나 동화책으로 만난 <오세암>은 그때와는 또 다르게 다가온다. 이야기의 배경이 눈 오는 겨울인 만큼 <오세암>에서는 책 표지만큼이나 하얀 시각적 심상이 두드러진다. ‘하얀 나비가 날 듯 눈발 가득한 바다’를 보고 ‘바다보다 넓게 내리’는 눈이라고 표현하는 아이는 스님을 만나며 ‘거지’에서 ‘길손이’로 이름을 드러낸다. 마치 길고양이 두 마리를 만나듯 스님은 아이들을 데려간다.     

 길 위의 손님 남매들이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새 울음소리로 나타나서’라니. 사람이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지. 읽는 내내 시를 읽는 듯 유려한 서술은 길손이가 하는 말에도 드러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시적인 길손이는 굴러가는 낙엽을 두고 ‘바람이 짚고 다니는 손자국 발자국’이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길손이가 사물을 자세히 보는 눈을 가지게 된 건 건 감이 누나에게 설명하게 된 과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길손이와 감이의 관계는 <몽실언니>의 몽실이와 난남이의 관계를 생각나게 한다. 난남이의 존재가 몽실이에게 역설적으로 살아갈 힘을 주었던 것에 비해, 길손이와 감이의 인물 구도는 조금 더 길손이 편에 치우쳐져있다. 길손이의 설명이 감이에게는 세상을 이해하는 큰 축을 차지한다. 눈을 뜨는 것과는 별개로, 설명에 못 미치는 세상 풍경에 그만 길손이를 더 그리워하게 된 감이의 모습이 도드라진다.     

 골방이라는 공간감이 주는 특이함도 <오세암>에 드러나는 매력 중 하나이다. 나만의 공간, 혼자서 사색에 잠기고 내면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어린이들은 꿈꾼다. 길손이는 그 안에서 관세음보살 그림을 보며 자신의 내면에서 그리는 엄마의 이미지를 투영한다. 그러나 그 마음은 부처님에게 자신의 욕망을 비치는 뭇 사람들의 것이라기보다는, 부처님을 ‘위해서’ 웃음을 주고자 춤을 추는 일종의 승무와도 같다. 그래서 길손이의 결말이 숭고하게 느껴지는 한편 ‘여승’의 한 구절을 읽을 때처럼 쓸쓸하다. 남겨진 감이가 너무 안타까워 마음에 계속 머무른다.          


+

어린이에게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성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오세암>을 어린이가 본다면 어떤 의미로 이해할까. 이제야 내가 <오세암>을 맘에 들어할 수 있는 까닭은 ‘한사코 작은 물초롱을 들고 나서’는 길손이가 흰 구름을 넣어가지고 간다는 이유를 받아들이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렸던 내가 작품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건 그저 공감능력이 부족한 어린이였기 때문일까. 변명하자면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물초롱에 구름을 넣어갖고 다니던’ 길손이는 그 행동이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함도 아니고 그 자체로 일상적인 행동이었다. 그 행동에 무언가를 투영해서 보는 것은 성인이고, 오히려 너무 어린이다운 행동이기 때문에 어린이 본인에게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장난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 상황에 몰입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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