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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곰 Sep 01. 2021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고

첫 동화 탈고 후 소회와 함께

빌 브라이슨 (2020).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개역개정판, 이덕환 역). 서울: 까치.


 우리는 우주에서 아주 작은 존재라는, 티끌 같은 크기로 찰나를 살아가는 존재라는 뻔한 메타포.

 그런 이야기가 2021년에도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공통된 지점을 울리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2020년에 개정되었다. J 교수님 수업 때 나는 <사피엔스>를 읽었는데, D 언니는 이걸 읽었다고 한다. 빌 브라이슨이라는 작가 이름을 기억조차 못 하고 있었던 나를 생각하면 내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과거로부터 놓치고 있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나 아까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 마음은 ‘역사’라는 이름이 들어간 책을 시작하기에 충분한 동기이다.

 어릴 때 친구들은 뭘 하며 사나 궁금했다. 나는 이 길고 기나긴 방학과 주말이 너무 지루한데. 그렇다고 평일이 스펙타클하게 재미있었던 것도 아니다. 10대인 나의 평일은 그저,


학교에 가고

선생님 말씀을 토씨 하나 안 빼먹고 다 받아적고

점심시간에 단짝 친구들과 어색하게 서서 새치기 당하고

방과후까지 꽉꽉 채워서 학교에 남고

문제를 풀고

어물적대다 잠이 들고


 계이름으로 따지면 연신 도, 도, 도, 도. 도만 시작하는 노래를 반복하는 일상이었다. 간단한 리듬이라도 조금 있으면 좋았을텐데.

 그래도 아예 할 일이 없는 날보다는 나았다.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던 초등학생 때의 시간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채우기 시작한 중고등학생 때의 일상은, 어찌 보면 잡생각이 들지 않는 루틴이었던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적어도 내가 공부하는 시간만큼은 아무도 소리 지르지 않았다. 방문이 슬쩍 열리고 나를 관찰하는 시선을 견디는 것은 끔찍이도 싫었지만, 그래도 책상에 앉아 있으면 폭언은 멈췄다. 수험생활이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전의 내 삶이 어땠는지 짐작케 한다.

 어린이가 방문을 닫는 걸 권력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공부하고 있는 나를 건드리거나 공격하지 않았으므로, 공부는 선택했다기보다는 강요 받은 방법이었다. 노키즈존 보유국인 한국의 어린이로서 살아가려면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존재를 지워야 하듯, 우리집에서 공부는 어린이이자 청소년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행동이었다(배부른 소리라고 이야기한다면… 맞는 말이다). 공부는 애초에 회피하고자 선택한 길이었으므로 재미로 시작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이따금 모래사장에서 키가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 앉는 경험은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칭찬 하나 없는, 오로지 채찍만 있는 가혹한 정서 환경이었지만 그게 내적 동기가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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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브라이슨의 세계는 공부하고 탐사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어린 나랑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즐거이, 스스로 발로 뛰며 인터뷰하고 공부했다는 점일 것이다. 삶은 계란 같은 지구 해부도에 머리가 트이던 그의 경험은 형태는 달라도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발현해서 이어나갈지는 사람마다 다르며 우린 그것을 개성이자 환경이라 부르곤 한다. 비록 내가 원하지 않았던 개성일지라도, 오롯이 혼자가 되어 공부하는 시간 속에서 수렴적인 지식을 습득하던 시간도 나의 개성이다. 나는 나를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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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재미있다. 툭툭 튀어나오는 유머, 때로는 자극적이고 때로는 진지하게 만드는 굴곡이 책을 끝까지 다 읽게 하는 매력을 만든다. 이 책은 고등학생 때 배웠던 과학 네 과목을 총망라하여 다루기 때문에 내가 알던 내용과 모르는 내용이 적절히 섞여 새롭다. 이과를 선택한 덕에 이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는 체력이 된 건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과학 지식은 수능특강에 박여 있고, 매여 있었다. 마치 넓은 초원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목줄 매인 염소처럼. 나는 초원을 바라보며 지정된 자리에서 풀을 뜯었다. 빌은 직접 초원을 걸어다니며 속속들이 몰랐던 이야기를 잘 다듬어 내 앞에 가져다주었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는 나도 먹었던 풀인데! 맞아,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DNA x선 촬영에 먼저 성공했지. 내가 아는 풀은 더 맛있게 느껴졌다.

로잘린드 프랭클린 (사진출처: 위키백과).

 어린 날 억지로 먹었던 여물은 기억 저편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쓰였다. 머릿속에 넣었던 수많은 모래알들은 어찌된 일인지 내가 만든 세상 속에서 진흙이 되어 남았다. 어떤 진흙은 토기가 되기도 하고 어떤 진흙은 다시 말라 뇌의 틈바구니 속으로 사라졌다. 억지로 외우며 하던 공부라고 해서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KARF나 프롤레타리아 같은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건 14살이었고, 아마 빌 브라이슨 식의 모험과는 조금 다른 식의 접근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나중에 그 단어를 마주쳤을 때 반가운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통섭적인 공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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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이 과학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방식은 체계적이면서도 흥미롭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는 선형식(linear) 인류학을 반박하거나, 너른 하늘에서 초신성을 한 자락을 찾는 어느 목사의 자폐적 모먼트는 교과서를 통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보통 오래 남는다.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단어와 단어 그 띄엄띄엄한 사이를 연결한다. 우리 뇌가 기억하는 방식이 생각그물처럼 퍼져나가듯, 이야기는 그렇게 꼬리를 이어 네트워크를 만든다. 그리고 그 네트워크는 다른 이야기들과 연결되기 더욱 쉽다.


 동화창작 수업을 들으면서 그래도 시놉시스보다는 괜찮은 평의 작품을 가져가게 되어 기분이 좋다. 인물이 생생하다든지, 이야기가 재미있다든지, 잘 짜인 안정적인(작가님의 평이었다. 세상에!) 플롯이라던지. 기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다. 조잡한 상징일 수 있는 ‘콩나물’은 내 유년 시절의 끝자락이다. 이야기와 다르게, 건강이 최고라던 아빠는 다시 공부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나는 사실상 완치가 되어 일상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콩나물 사건 이전의 나는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고, 그림보다는 말풍선으로 이야기를 쏟아냈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며, 재미있는 걸 좋아하는, 언어 능력이 또래에 비해 좋았던 어린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중고등학생 때를 마냥 흙빛이라고 묘사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때에도 책을 읽었고, 부족한 그림과 글을 쏟아냈으며, 친구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는 청소년이었다. 중요한 건 내가 동화를 쓰면서 그 당시를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병에 걸린 일이 남의 이야기인 마냥 무덤덤하다고 대해 왔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지루했다. 합평 시간에 한 선생님이 ‘왜 이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이렇게 아픈데 이사를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 이야기가 모티브임을 마지막에 공개했으니 의도를 갖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을텐데, 그 말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제야 기억은 재구성되고 마음에 역사가 되어 남기 시작했다. 어린 나는 왜 병원에 오래 다니며 학교를 빠져야 하는지 궁금해했다. 왜 체육 시간에 나가지 못하는지 스스로 납득하진 못했지만 순응했다. 친구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고 바랐다. 그 어린 마음을 달래지 않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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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의 이야기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이다. 누구의 역사냐 하면 우주, 지구, 인류, 인류 외의 생명 등 끊임 없는 목적어를 붙일 수 있다. 그렇게 총망라한 두꺼운 책에 비해 내가 이번 방학 때 써내려간 a4 열 장 짜리의 단편 소설은 길이 면에서 굉장히 짧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동화를 완성하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빌의 책에 버금가는 만큼 고민하고 정리했다. 그리고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하나로 귀결된다.

 조금만 주변에 신경 쓰면 우리 모두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갈  있어

 짧은 햇빛이 때로는 어떤 식물을 살리곤 한다. 콩나물이 원하는 양육 방식은 아마 햇빛을 충분히 받으며 무럭무럭 크는 것일 테다. 그 햇빛이 비록 치명적이며 콩나물을 단 하루 살게 만들지라도, 그런 꿈을 꾸는 콩나물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이야기로 말하고 싶었다.

 예컨대, 오늘이 학교에 나오는 마지막 날이라면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하고 싶을까?

 나의 동화는 극적 질문에 결말로서 답한다. 왜 엄마아빠는 원주로 이사 가지 않았는지, 왜 담임선생님 김은 체육 시간에 나가지 못하는 나를 교실에 혼자 두었는지에 대한 의문. 거의 모든 ‘나’의 역사를 회고하는 일은 결국 미결 감정의 끝을 맺는 촘촘한 과정이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는 사람이라면 지난한 과학 지식의 투쟁 과정을 촘촘히 따라가게 될 것이다. 거인의 어깨로 끌어올려지는 경험을 한 번이나마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너머의 풍경에 매료되고 만다. 물론 공부는 초기 진입장벽이 굉장히 높은, 쉽지 않은 과업이다. 거인의 어깨로 올려지기까지 팔이 빠지기도, 근육이 늘어나기도 하는 생경한 체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의 나처럼, 어깨에 올라서야지만 숨을 틀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불가피한 고통의 오름길이었겠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선택의 갈래에 설 기회를 얻어 공부의 길을 고른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홀로 공부하며 수렴적으로 지식을 정돈하느라 외로움을 진득하니 맛본 당신이라면 이 책은 괜찮은 도피서가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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