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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곰 Sep 01. 2021

폭력 생존자

2021년 1월 2일 저녁 7시의 소회

 가는 길 내내 ‘아동폭력 생존자’라는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눈물이 줄줄 흘러서 운전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곳을 탈출했을 때의 후련함도 있었다. 그러다 번뜩, 사이드미러로 밤의 자동차 불빛이 반사되어 깜빡이면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번호판을 확인했다. 누군가가 끼어들기할 때도 번호판을 제일 먼저 확인했다. 다른 건 안 보였고, 차종이 검은색 그랜저일 때 특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언제 여기까지 쫓아올지 몰라.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만 계속해서 들었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전세 계약이 다가오니 주인집에 전화를 해야 하는데. 중얼거리고 있으니 B가 수화기 너머로 이야기했다. 괜찮아. 일단 지금은 조심히 집에 도착하는 것만 생각해.

 아, 하는 생각에 이를 악 물고 다음 날 출근까지 해냈다.


 퇴근 후, 따끈한 바닥에서 B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3일 간 긴장했던 몸이 풀어졌는지 밝은 형광등 불빛에도 아랑곳 않고 푹 잤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며 치근대는 손길에 시계를 보니 9시 반 남짓이다. 오래간만에 깊은 잠을 잔 듯하다. 목요일부터 불편하고 딱딱한 잠자리에서 추위에 떨었던 게 생각이 났다. 목, 금, 토, 일, 월,... 5일을 선잠을 자고 내리 3시간을 운전했으니 몸이 지칠 법도 하다.

 그래도 나는 이제 안전하다. 5분만, 하고 10분을 더 누워있었다. 그러다 혹시라도 꿈을 꿀까 두려워 퍼뜩 일어났다.


 지금의 현실은 나에게 안도감을 준다.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김겨울의 라디오를 들으며 저녁 설거지를 했다. 지난번에 이어 듣던 <아Q정전> 얘기를 마저 들었다. 이 소설에서 정신승리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고 했다. 진행자들은 '적절한 정신승리는 정신건강에 좋다'  기분 좋게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면 조금 더 내 문제가 가벼워질까 싶어서. 정신승리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건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좇지 않는 사람이 모욕을 들었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 방어라고 생각했다.


 "나는 웬만한 민원은 괜찮아. 어떤 말을 들어도 내가 집에서 듣는 말보다는 덜 상처거든."


 그렇게 나의 일을 웃음으로 치환하는 일은 다른 사람 앞에서만이었다. 정작 당신이 던지는 모욕을 눈앞에서 받아칠 때에는 그런 해학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심한 욕을 마구 싸재끼면서 당신을 깎아내렸다. 그건 동시에 내뱉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평소답지 않게 울음으로 잔뜩 일그러진 목소리가 나올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또, 당신의 손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해학은 당신에게 웃음이 되지 않으므로, 당신에게 위해를 끼치는 말이 되므로 나는 그것을 애써 삼켜야만 했다. 갈비뼈 언저리 깊이 묵직한 미결 감정이 쌓여갔다.


 그리고 마침내 토요일 밤에는 그것을 토해냈다. 그만큼의 용기를 지니기까지 몇 해 동안 마음을 다독이며 힘을 길렀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꾸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떠넘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 자꾸만 속이 문드러져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의도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든 한 번은 끊어내야 했다.

 명명백백하게 나를 향해 공격하고 온갖 상처가 되는 말들을 쏟아내는 당신의 얼굴에서 그래도 나는 몇 해 동안 반성의 기미를 찾아보려 노력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나. 부모와 아이의 권력관계 속에서 당신은 의도가 다분한 폭력을 일삼았고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건 내가 독립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몇 년을 기다렸다. 당신과의 관계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깨닫기 시작한 때부터 장장 15년을 기다렸다. 무수한 검사를 통과해야만 했던 초등학교 일기장에는 당신의 폭력을 기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부하며 기다렸다. 독립해야지. 반드시 혼자서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나에게 벌어지는 이 폭력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지. 공부해서 힘을 길러야지. 사실 당시에는 어떤 의도도 없었고 그저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 책을 읽고 있으면 당신이 나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살고 싶어 하는 공부 앞에서 나는 독보적이었다. 그래서 이후, 내가 절실히 공부하는 이유가 누군가에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만한 환경이 뒷받침된 복 받은 인간'으로 비칠 수 있다는 건 추호도 몰랐다.

 그렇지. 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그러한 신념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가정의 재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공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가정 풍토가 바탕이 되었겠지. 그럼에도 공부는 나의 온전한 무기가 아니었고, 결론적으로 늘 최선의 방어는 아니었다. 공부만 잘하면 뭐하냐느니, 싸가지 없다느니, 짐승만도 못한 년이라느니, 건방진 씨발년이라느니, 이 모든 말들은 내가 괄목할 만한 비행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방 안에서 당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버티고 또 버텼다. 그래서 공부를 핑계로 중학생 때 도서관으로 피했고 고등학생 때 기숙사에 들어갔고 대학생 때 집에 가지 않았다.


 해리포터에서 방학 때 기숙사에서 두들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울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 밤 당신은 또 한 번 나에게 손을 휘둘렀고 나는 막았다. 나는 도망나왔고, 다시 잡혀들어갔다. 그가 누군가 보는 앞에서는 폭력을 휘두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본능적으로 아빠를 불렀다. 다 큰 동생은 방에서 울고 있었다.

 핸들을 잡고 운전할 때에는 깊은 밤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니 고작 8시였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구나. 다만 나에게 남은 감정은, 동생을 향한 미안함이다. 너를 두고 나오는 게 또 하나의 어려움을 물려주는 일일 텐데. 당신은 내 동생을 붙잡고 한참을 자기 속풀이와 화풀이를 할 사람인데. 그렇게 내 동생마저 떠나면 당신 곁에는 친구도 가족도, 아무도 안 남게 될 텐데.


 오늘 퇴근을 하는데 하늘이 아직 밝아서 놀랐다. 뒤를 돌아보자 학교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을 밝기만큼만 해가 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어둡지 않네, 하는 생각에 캘린더 앱을 켰다. 동지가 지나있었다. 낮은 천천히, 천천히 길어질 것이다. 다시 짧아지는 날은 오겠지만, 그래도 다시 길어지는 날은 온다. 나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B에게 전화했다. 함께 저녁을 먹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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