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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곰 Sep 05. 2021

갑자기 기혼자 된 썰

'어머니'라는 호칭이 주는 감각에 대하여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을 다 보낸 평일 오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교사가 된 이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받는 일은 항상 긴장감을 준다. 내가 미처 저장하지 못한 보호자일 수도 있고, 예전 제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수도 있다. 매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지난 제자들의 번호를 지우기 때문에 일단 전화를 받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나는 예의 업무 톤―서비스직과 같은 높고 친절한 톤의 보호자 상담 버전―으로 전화를 받는다.


 "네~ 여보세요."

 "... 지 00 전화번호 아닌가요?"


 예상치 못한 톤의 목소리에 놀라신 듯 되묻는 말속에는 엄마의 이름이 들어 있다.


 "아, 이건 저희 어머니가 예전에 쓰시던 번호예요."

 "어머, 그랬구나~ 세상에~ 저는 00이랑 기계체조 같이 했던 친구예요."

 "아하, 초등학교 친구분이신가 봐요~ 문자로 어머니 번호 적어드릴까요?"

 "아뇨, 지금 바로 불러주세요."


 맞다. 지 여사는 한때 초등학교에서 기계체조 대표셨고, 이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이 깜짝 놀라곤 한다. 번호를 불러드리고 나면 전화를 끊으실 줄 알았는데, 친구분은 무언가 신기하셨나 보다.


 "어머.. 목소리가 너무 예쁘네."

 "감사합니다."

 "아들을 결혼시켰나 보네."

 "... 네?"

 "남편이 몇 살이에요?"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만약 제가 결혼하게 된다면 제 미래의 남편은 몇 살일까요?


 "저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어머! 그랬구나. 미안해요. 어머니라길래 며느리인 줄 알고."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든 요즘 시기에 결혼이라니요. 이 말은 속으로만 삼키고 그저 허허 웃었다. 아무튼 어머니 친구분, 목소리가 너무 좋다는 말씀과 당신도 아들이 있으시다는 말씀(?)을 거푸 남기시고 전화를 마치셨다. 기분이 나쁜 전화는 아니지만 무언가 씁쓸함이 남았다.


 인스타그램으로 결혼하신 분들 게시물을 종종 보다 보면 '친정어머니'라는 호칭이 신경 쓰인다.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친정'으로 바꾸어 부르는 건 마치 MZ세대의 홍길동을 자처하는 것 같다. 어머니라는 칭호의 기본값이 내 핏줄에서 남의 편 핏줄로 넘어가는 게 내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아주 어릴 때 나는 할머니가 두 명이나 되는 게 헷갈렸던 모양이다. 단양 사는 할머니도 할머니고, 풍기 사는 할머니도 할머니면 나는 할머니가 두 명인 건가? 살다 보면 두 분을 구분 지어 부를 일은 분명히 생겼고, 단어를 적확하게 사용하고 싶었던 어린 나는 엄마에게 이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물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풍기 사는 할머니는 풍기 할머니라고 부르면 되지."

 집이 단양이었던 나는 당시 외할머니를 더 자주 뵈었고 더 자주 입에 올렸다. 같은 단양에 사는 김영자 씨에게 굳이 '외'라는 글자 하나를 더 붙여서 외할머니로 부르는 게 어릴 때 나에게도 비효율적이고 귀찮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적절한 용법이었으므로 나는 이 용법을 애용했고, 그러다 어느 명절, 아마 내가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오늘 우리 풍기 할머니 보러 가는 거야?"

또는 풍기에 도착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풍기 할머니, 안녕하세요!"

 기억 어느 저편, 가벼운 언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왜 애한테 풍기 할머니로 부르도록 가르쳤는지에 대한). 가벼운지 심각했는지는 본인들이 아시겠지만 그걸 직접 여쭤본 적은 없다. 아무튼 이후 아빠는 나에게 단양 사는 할머니는 '외할머니', 풍기 사는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라고 부르라고 가르쳐주셨다.


 우리 엄마는 소수자성에 대해서나 여성학에 대해서나 민감한 시선을 갖고 계시지는 않지만, 아마 나보다 긴 시간 삶을 살아내며 깨달으신 바가 있었을 것이다. 사소한 일이지만 무언가 요상한 일. 엄마 쪽 할머니를 '외할머니'로 부르는 게 뭐가 그렇게까지 불편하겠냐마는, 그렇다고 '할머니'를 '풍기 할머니'로 바꿔 부르는 건 용납되지 않는 사소한 일. 중요한 건 할머니를 어떻게 부르느냐가 아니라 그 이면에 있을 것이다.


  명시적으로 가르침 받은 일은 잘 따르는 나였으므로 이후 나의 할머니는 '할머니'와 '외할머니'로 나뉘었다. 그러나 각자의 집에서 두 분을 각자 '할머니'로 부르지, '외할머니'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사는 터가 단양이었던 나는 기본값이 단양이었기 때문에 김영자 씨를 '단양 할머니'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은 '모든 질문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외침'이라고 했고, 미셸 푸코에 따르면 우리는 스스로를 앎에 민감하게 만들어야 한다. 세상을 알아가는 어린 나는 할머니를 호명하는 일에 질문을 던졌고, 그 앎은 오늘의 내가 우리 어머니를 어머니로 부르지 못할 '사소한' 위기에 처한 순간과 맞닿아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차이는 무엇인가.

 결혼은 나를 무엇으로 바꾸어놓는가.


+

모든 인용은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재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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