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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곰 Mar 20. 2022

나에게도 물성이 있다면

쓰는 일이 버거워 말라가는 날

 혼자 있는 시간이어야만 하루를 비추어볼 수 있다는 게 서글프다. 익숙치 않은 무료함이 나의 오늘을 가득 채웠음을 깨닫고 나면 시간은 이미 너무 지나 어느 것도 시작하기 버거운 때이다. 그럼에도 글을 다시 써야지, 써야지 하며 오래 전부터 묵혀둔 노트를 찾는 이유는 아마 내가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야만 생각을 할 줄 아는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본디 말보다는 글이 편한 사람이었다. 편안함을 주는 사람들 곁에서 몇 년 동안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사실을 문득 잊게 된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 벌써 인생의 3분의 1이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음에도 다시 혼자 있는 나날로 돌아가고 나면 왜 나는 제자리를 찾았다는 묘한 안도감과 설렘과 기쁨을 느끼는가. 아마 이 상태는 일시적일 거라고, 잠깐 기다리면 다시 사람들과 저녁을 차리고,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고, 아니 대화를 주고받지 않더라도 가만히 tv를 응시하며 같은 부분에 웃고, 남은 찬거리를 치우고, 어제 설거지한 그릇을 정리하는, 그런 일상이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바라온 모습일까?

 인생의 3분의 1이 안정을 찾는 데에 쓰였다면, 3분의 2는 안정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나돌며 못난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까닭이 있다. 나는 혼자서 침잠하며 삶의 중요한 의미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가며 가늠해봐야 하는 사람인가 보다. 물고기의 아가미, 말미잘의 촉수 가닥, 아코디언의 벨로즈를 더듬어서 하나하나의 결을 쓰다듬는 과정이 나에게는 고통이자 성질이 된 것일 테다. 긴 시간이 지나 나는 많은 것이 달라졌고 여전히 학생이던 나를 안쓰러이 여기고 동정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때 적어내려가던, 고향집에 두고 온 공책 몇 권이 마음에 남는지. 다음 식목일에 본가를 방문할 때는 꼭 그들을 챙겨와야지. '집에 불이 나서 두 가지만 챙길 수 있다면 무엇을 챙기겠는가'라는, 신뢰써클스러운 질문에 항상 대답해오던 그 공책들을. 내밀한 마음을 누가 볼까 무서워 책장 꼭대기 혹은 제일 바닥진 곳에 버려두던 그 노트들을.

 여전히 브런치에 글을 쓰고 발행하는 일이 낯설다. 나는 내 글의 유일한 독자였고, 남들이 듣고 싶은 말보다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허겁지겁 풀어내는 일이 아무래도 더 쉽다. 글을 예리하게 벼려내는 일이라면 끈덕지지 못한 내 성격 탓을 하며 몇 년을 물린다. 한편으로는 누가 보겠어, 싶은 마음으로, 또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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