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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중요한 사람?

독립된 연구자로서 연구하고 싶은 이유

by 파란곰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정의'라는 가치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20대 중반에 친구와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아마 보드게임을 하던 상황이었던가. 친구 J가 어떤 후배에게 하는 말을 듣고, 나는 반사적으로 후배를 옹호하는 말을 했다. 그때 J는 나의 말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 나이가 되어 그렇게 목소리 높여 싸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날 겪었던 감정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다.

J와 화해하면서 들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너는 정의로운 사람이구나.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오늘날 다른 사람이 기분 나빠할까봐 옹호하는 말을 한다는 것이 흔치 않음을 알았다. 맥락에 따라 오지랖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J는 내 말을 정의로움으로 받아들여주었다.


내가 과학교육 연구자로서 사회적 가치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는 까닭은 그와 같은 기질이 있기 때문이라 짐작해본다.

그렇다면 현상에서, 사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 있음에도 자꾸만 내가 거대 담론의 가치를 옹호하는 이유는 뭘까.


'정의'와 같이 커다란 용어에서 오는 권위에 의존하기 때문일까?

본질주의를 꺼려함에도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옳음이라는 본질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의 생각을 찾지 않고 누군가의 이론을 좇는 게으름 때문일까?




강렬했던 경험은 삶에서 쉬이 잊히지 않는다.


삶이 통제력을 잃고 부유하며 마구 흐르던 시기가 있었다. 한없이 가벼웠던 자아는 나를 무겁게 해석해줄 사람을 찾아다녔고, 똑같이 미숙했을 누군가에게 그 일을 반복해서 기대했다.


위클리 스케줄러에 "모두가 최소한 동의하는 인권의 바닥은 어디까지일까"라고 적어둔 메모가 있었다.


위클리 스케줄러를 쓰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종종 뒷장의 메모란에 뜻 없는 단상을 적곤 했다. 당시 메모를 보면 스무 살의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전부 옳다면 그것이 의미가 있는지와 같은 생각에 한없이 좌절하고 있다. 그땐 그게 가고 싶었던 학과의 면접을 망쳤기 때문인줄 몰랐다. 그 학과의 면접을 위해 태어나서 처음 학원에 다니면서도, 그 분과에서 가장 말을 잘했고 자신 있게 응답했던 나는 정작 '나의 장점'을 이야기해보라고 했을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학과는 떨어졌고, 전혀 생각도 않던 어떤 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꽤 괜찮아, 하는 자기 위안에 허덕이며 동시에 나를 학대했다. 당시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들과 만났고 사귀었고 헤어졌다. 짧은 관계에 한해 나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그건 연습이었으니까. 마치 면접 학원에서처럼 나는 자신있었지만, 정작 다시 긴장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준비한 것의 반도 꺼내지 못했다. 그외에는 뭐든 괜찮았다. 아무 기준이 없어도 뭐 어때. 끈을 놓은 것처럼 살았다. 다행히 그때는 그래도 됐다. 공부는 다만 관성적으로 했을 뿐이었다.


1학년 1학기 교육사회학 시간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삶을 교육사회학 이론으로 설명해보라던 과제에서 나는 3페이지의 글을 적어서 냈다. 힘이 드는 일은 아니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 누군가를 붙잡고 토로하기보다 노트를 펴고 글쓰기를 선호했던 시절이었다. 마침 주제도 나의 이야기이니 간편해서 늘 쓰던대로 썼다. 아빠는 농촌 사람.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살았었는데, 어느 날 전쟁을 피해 삼대가 있는 짐 없는 짐 다 두고 작은 시골에 숨어들었다. 무일푼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결혼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엄마는 아빠와 처음 소개팅할 때 '과수원집 아들'이라는 소리에 냅다 결혼했는데 밭이 한 뙈기도 안 되더라며 잘게 불평했다. 그리고는 엄마네는 어릴 적엔 꽤 잘 살았다는 말을 꼭 붙였다. 작은 읍내에서 외할아버지는 '운전'을 하실 줄 알았고, 당시에 사람을 부려서 운송업을 좀 했다고 한다. 가세가 기울었던 건 교통사고를 연달아 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엄마의 자매들은 모두 대학에 갔다. 예술을 하는 사람도, 교사를 하는 사람도 모두 딸이었다. 엄마는 간호사가 됐다, 곧 그만두었지만.


어른이 된 아빠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서울에 올라가 살았다. 그래서 매년 할머니 생신 즈음에는 서울 근교에 잡아둔 숙소에 모여 1박 2일을 함께 보내곤 했다. 하루는 친척오빠들이 농어촌은 불공평한 제도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는 인터넷 강의도 잘 되어있고, 학원도 다 있는데 시골 애들이 왜 혜택을 받냐는 거였다.


그 일에 대해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고 과제에 적었다. 그 말을 하던 친척오빠들을 데려다가 나랑 같은 고등학교에 앉혀놓고 공부한다면 똑같은 성적이 나올지 궁금하다고 썼다. (아직 한 학기 밖에 안 됐지만) 대학생이 되어 사귄 친구들이나 고등학생 때의 친구들 모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는데, 왜 살아가는 방식은 이렇게나 다르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솔직하지 못한 과제였다. 나는 '나도 똑같이 서울에서 공부했으면 내가 원하는 학과에 갔을 거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 책망을 하고, 내 욕구를 똑바로 바라볼 줄 모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그다지 쿨하지 않다는 생각에 엄마 아빠와 친구들 이야기로 빌어먹어가며 과제를 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한 것은 그런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의 근거로 나는 기능론과 갈등론을 인용했다. 이론에 안주하는 습관, 구조주의라는 달달한 껍질을 벗어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내가 처음 생각한 정의로움이었다. 내가 겪었던 불만이 나만 겪은 게 아니라는 것, 거기서 오는 거대한 안도감이 당시의 나를 절절하게 살렸다.


당시 교수님이 과제에 어떤 코멘트를 달아주셨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기능론과 갈등론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낸 것에 적당히 동의하는 코멘트를 적어주셨던 것 같다. 코멘트와 관계없이 그 과제는 지금까지 혼자 노트에 써오던 글과는 달랐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은 혼자서 감정을 토해내는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 나도 모르던 페르소나에 나를 한정지어 표현하기도 하고, 고고한 척 상황을 바라보는 듯 하면서도 실은 내가 모르던 이상향을 대놓고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연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정의라는 말도, 연구라는 말도 나에게는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여전히 현상을 관심 있게 보는 것은 어렵다. 끝장나는 연구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여전히 나에게 부족한 지점을 '다른 사람의 말과 동의'로 채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학위논문에서 중요한 것은 오롯이 나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지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설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다시 엄마와 아빠와 친구들과 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어떤 지점에 대해 불만을 느꼈고, 그것을 '기능론과 갈등론'이라는 프레임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려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쩌면 내가 불만을 갖고 있을 어떤 현상이 지금까지의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또는 적절하지 않은 현상일 수 있겠다. 그리고 그 현상을 설명하는 나의 렌즈가 또다시 누군가를 살리는 힘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독립된 연구자로서 연구하고 싶은 이유이다.


여전히 나는 정의로운 연구를 하고 싶다. 그러나 독립된 연구자라면 정의라는 말 대신 다른 렌즈, 나만의 시선으로 대체해야 한다. ( )로운 연구를 하고 싶다, 의 빈칸을 채울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해야겠다. 처음부터. 현상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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