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잘하려고? 아니요. 월급 오르나요? 아니요. 이직하시게요? 아니요.
※ 글쓴이는 '교육대학원, 또는 사범대학 일반대학원의 학위과정'만을 경험했습니다.
교사가 수업을 잘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갈 경우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그런 목적이라면 교사연구회나 교학공에서 활동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대학교 수업 들어봐서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올 것이다. 비슷한 취지에서 1정 연수를 듣는다면 그 부분에 대해 도움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대학원은 강의 들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그럴 바에 명강사의 일회성 특강이 낫다), 그 강의가 당장 나에게 도움이 되고 쓸모가 되지도 않는다(그럴 바에 연구회나 교학공이 더 낫다).
다만 대학원생이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상태에 머물러있다는 점'은 색다르게 특별하다. 왜냐하면,
1) 어떤 주제에 대해 긴 시간 동안 몰입해보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학원생은 논문 쓰는 시간보다는 '논문 쓰기 싫다..' 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다. 그러나 그 생각에 잠겨 지내는 동안 주변의 다양한 현상을 그것의 렌즈로 바라보면서 고민하게 된다. 그래! 고민하는 시간이 결코 쓸모 없지 않다(제발). 그리고 그 고민의 시간은 나에게 전문성이 된다. 나는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그 주제에 대해 최소 2년은 더 고민한 사람이 된다. 고민만 했게? 그 2년은 다른 사람들이 끊임없이 거는 딴지에 방어하며 내 생각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낸 시간이다. 별 거 없는 것 같아도 그 시간이 주는 의미가 꽤 크다. 교육 현장에는 여러 가지 교과를 다루어야 하다보니 얕고 넓은 지식에 답답함을 느끼는 교사도, 비슷한 내용지식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다루며 지루함을 느끼는 교사도 있다. 하나의 분야, 여기 아니면 적용하기 어려운 깊은 전문성에 빠져보는 경험이 일상에 환기가 될 것이다.
2) 대학원으로 인해 이전에는 만날 수 없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학원에는 교사만 갈 수도 있고, 교사가 아닌 사람들이 갈 수도 있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대학원 동기/선배/후배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인지, 강의로 인해 또는 강의 전후로 그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 것인지가 중요하다. 물론 대학원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연구회, 교학공, 동아리, 직장인동호회, ... 그런 의미에서 보면 대학원은 마치 현대사회에서 책을 읽는 일과 비슷하다.
책은 과거에 정보를 주는 거의 유일무이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책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현대사회에 책만이 줄 수 있는 가치가 있다면? (종이)책이 가지는 물성에 대해 얘기하려면 한도끝도 없지만 요약하자면, 책은 한 분야에 대해 비교적 깊고 길게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독자는 몇백 페이지에 가까운 글(비교적 오래 준비한 글의 묶음)을 읽는 내내 경청해야 한다. 물론 경청하는 내내 메모도 하고 생각도 자유롭게 떨치고 책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책은 일방향적이다. 그 강력한 방향성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친다. 대학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3) 대학원은 대학원생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주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학원에 등록하면 대학원생이라는 이름이 부여된다. 그리고 그 이름은 졸업 전까지 마음의 짐이 된다…. 졸업은 미룬다면 언제까지나 미룰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 속해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가지는 대학원생이라는 정체성이 자기 행동에 어떤 변화를 준다. 당연히 부담이고 족쇄가 된다. 동시에 새로운 일을 시도할 물꼬를 트는 것이기도 하다. 졸업 전후 모두 해당된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교사에게 교육대학원은 비싼 취미인 것이다. 취업을 위한 준비나 스펙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교사가 석사를 달거나 박사를 단들 승진점수(연구평정)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일단 나는 대학원에서 공부한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교직경력과 박사과정 경력(?)이 비슷해진 지금 시점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되새겨보았을 때, 확실히 박사과정을 시작한 뒤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바뀔 수 있다는 건 어딜 가도 겪지 못할 색다른 경험이긴 하다.
그만큼 쉽지 않았고 힘든 시간이긴 하다. 사람이 바뀌는 게 쉽지 않다는데, 하물며 다 큰 성인이 바뀌려면 얼마나 많은 반박이 들어와야만 할까. 나 스스로에게 설득이 되건 되지 않았건 이 분위기에 담갔다 빠져나왔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고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다시 살펴봐야 할 시점이 왔다.
1정 연수와 비교해보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는 교사에게 1정 연수는 특별히 새로울 게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보다 교육계에 좀 더 오래 몸 담았던 사람들이, 내가 스스로 찾아서는 듣지 못할 어떤 강사들의 이야기를 연결시켜 준다는 것은 좋은 기회이다. 일종의.. 평생교육 공구하는 느낌. 돈 없는 연예인(aka 교사) 팬미팅 보는 느낌. 심지어 회사 차원의 복지, 즉 무료인데 출장비까지 준다? WOW 초등교사란 이런 작은 출장비에도 감사해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들이다.
반면 대학원은 다르다. 교수님은 딱히 우리 분야 존잘이 아니라서 그들과 만나는 시간이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가만 보니 누구들은 나보다 수업 스킬도 별로인 것 같아. 강의 준비도 제대로 안 해오는 데다가 일단 되게 재미 없는 이야기만 주구장창 한다. 그러더니 나보고 계속 말해보란다. 글을 써보란다. 표현을 자꾸 시킨다.
아, 당연하지! 대학원은 엄밀히는 지식을 쌓는 곳이 아니라 지식을 만드는 곳이다. 게임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재미를 주지만 대학원은 게이미피케이션 시스템을 갖춘 곳이 아니다. 당장 흥미 있는 분야가 없다구요? 응, 알면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 일단 시작해! 물론 큰 돈 큰 시간을 들이는 만큼 후회할 가능성은 늘 있다. 그럼 대체 그런 위험 부담을 지고서라도 대학원에 가는 이유가 뭔가? 내 돈 주고 내가 욕 먹을 이유가 있나? 맞아, 다 맞는 말이야. 그럼 이제 대학원 안 가도 된다.. 근데 내 돈 주고서라도 내 글 첨삭해주고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자기 생각을 어필하는 그 분야 전문가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 특히 른 사람의 생각에 대놓고 반대하는 게 큰 실례가 되는 사회에서는.
그러니까 연구란 건 패턴을 찾는 일,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을 증거에 기반하여 주장하는 과학적인 글쓰기, 매우 전문적이고 협소하므로 다른 데에 적용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그 일을 직업으로 해오는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은 그에 맞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책을 디립다 읽기만 하고 그것에 대해 사유하는 일은 많이 안 했는데, 어느 순간 지루함이 있었다. 그냥 여기서 하는 말이 저기서 하는 말 같고, 에세이에서는 늘 안온한 말만 하고, 뭔가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학교에서는 그냥 하는 것만으로도 다들 잘했다고만 한다. 뭔가 일이 들어오거나 수업 준비를 하면서 열심히 생산은 해보는데 그냥 똥 같아..
이런 삶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건강하고 바람직했다. 제때 일어나서 수업하고 밥 먹고 운동 다녀오고.. 다만 그냥 내가 그런 삶에 안 맞았던 거다. 강유원의 <책과 세계>에 그런 말이 나온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나는 안온한 삶을 평가절하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그냥 병든 인간이었던 거지, 뭐.
그 세상에서 나와서 나를 조금 더 살펴보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이라면(다른 말로 이직을 경험해보고 싶은데 교사를 그만두기 아깝다면) 전일제 대학원의 시간이 꽤나 의미있을 수 있겠다. 학위는 일종의 운전면허 같은 거니까 따고 나면 다른 길이 열리긴 한다. 기관연수 강사로 나갔을 때 가끔 수당을 쬐끔 더 쳐준다던지.. 그쪽 교과 의뢰가 외주로 들어온다던지..(다시 말하자면 초등교사는 작은 것에도 감사해 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들이다) 근데 그런 돈벌이야 교사연구회 가면 출판사에서 많이 시킨다. 그보다는 내가 전문가가 되어보는 경험, 연구라는 세상이 해금되는 경험을 해본다는 마음으로 가면 좋겠다.
의미가 있다고 했지 행복하다고는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