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는 숙제, ‘고독’이라는 선물
삶의 어느 순간, 문득 혼자가 된다. 의도하지 않았던, 하지만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는 상황. 두 아들은 독립해 각자의 삶을 꾸리고, 아내는 직장 때문에 교동으로 발령받아 주말부부가 되었다. 35평 집에서 25평으로 줄여 이사한 2024년 12월 27일, 비움의 철학을 시작하려 했던 그날이 내게는 텅 빈 공간과 마주한 날이었다. 물건을 버리며 마음의 짐도 함께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공간이 줄어들자 눈에 보이지 않던 짐들이 쏟아져 나오듯, 내 마음속 허전함은 더 크게 밀려왔다.
처음에는 25평이라는 작은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8개월을 살고 보니,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과 감정의 크기 문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환경에 적응하기 나름이었다. 물리적인 답답함은 사라졌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저녁 시간이 되면 아내의 빈자리가 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혼자 하는 운동도 흥이 나지 않았고, 독서를 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나 TV를 봐도 내용은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그저 텅 빈 시간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늘 내 곁에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깨지며 마음속에 빈 공간이 생겨버렸다. 아내는 버팀목이었다. 보이지 않는.
이것은 외로움인가? 아니면 고독함인가?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 동안 이사를 해도 지인들을 초대하지 못했다. 아내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없는 틈을 이용해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며 그들의 "맛있다"는 인정과 칭찬으로 내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려 했다. 지인들마다 음식이 맛있다고 호평 일색이었다. 인정받는 기쁨에 도취되어 더 자주 선후배를 초대했다. 북적이는 집, 웃음소리, 술잔이 오가는 시간들. 이 시간이 외로움을 달래줄 것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밤늦도록 이어진 술자리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뒤의 집은, 낮의 북적거림만큼 더 크게 텅 비어 있었다. 관계를 통해 외로움을 채우려 할수록,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더 커졌다.
5월, 치과 치료로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을 부르는 횟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치아도 이런 방치된 생활을 더 이상은 보고 있을 수 없다며 절규하듯 치통을 안겨주었다. 선후배는 치과를 다니며 임플란트 치료를 받는 모습을 안쓰러워했고 더 이상 우리집을 아지트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치통과 더불어 25평이라는 공간에 다시 홀로 남겨졌다. 긴 밤 육체적, 정신적 고통가 더불어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외로운 건가? 아니면 고독한 건가?
심리학적으로 보면, 외로움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결정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선택하는 감정이다. 타인의 인정과 시선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할 때,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반면 고독함은 외부의 관계나 인정에 좌우되지 않고, 내 생각과 감정에 대한 결정권을 내가 온전히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외로움이 타인과의 연결 부재에서 오는 공허함이라면, 고독함은 자신과의 깊은 만남에서 오는 충만함이다.
인생의 후반기를 뜻하는 '갱춘기'는 외로움에서 고독함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이 시기에는 자신의 결정을 외부의 인정으로 확인하려 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경계해야 한다.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관계에 매달릴수록, 우리는 정작 중요한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혜롭게 보내려면, 고독함을 내 것으로 만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정한 고독은 자기 자신을 위한 적극적인 자기 결정권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는 방법을 스스로 찾는 것이다. 나의 경우, 근력 운동, 맨발 걷기, 독서, 뉴스 시청은 사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 모든 행동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외로움의 부산물이었다. 하지만 글쓰기와 마라톤은 달랐다. 글쓰기와 마라톤 만큼은 오롯이 나와의 대화였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글쓰기와 마라톤을 통해 나는 외로움을 걷어내고, 진정한 고독을 즐기기 시작했다. 두 가지는 서로 정 반대인 것 처럼 보인다.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글을 쓰거나 마라톤을 할 때 나와의 진솔한 대화를 멈추지 않고 지속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만의 고독한 시간을 위한 활동은 글쓰기나 마라톤처럼, 외부의 인정이나 평가가 아닌 순수한 내적 만족을 추구해야 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기, 조용한 공원을 산책하며 생각 정리하기,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배우기 등 그 방법은 셀 수 없이 많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활동이 '나'를 위한 자기 결정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외로움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흉내 내는 고독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시간을 즐기는 진정한 고독을 찾아야 한다. 관계에서 갈구하던 인정의 욕구를 고독으로 승화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독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 거창한 활동 만은 아니다. 오히려 작고 사소한 실천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퇴근길에 5분만 시간을 내어 늘 다니던 길 대신 낯선 골목길을 걸어보는 것, 또는 걸음 수에 따라 캐시를 지급하는 앱을 켜고 집 주변을 10분간 천천히 산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맨발로 공원 잔디를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작은 행동은 '지금 이 순간,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라는 자기 결정권을 확인하는 소중한 경험이 된다. 낯선 풍경을 바라보고,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땅의 촉감을 느끼는 동안 우리는 잠시나마 타인의 시선과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물론, 타고난 기질과 성향에 따라 생각과 감정의 크기는 모두 다르다. 그러므로 갱춘기에 접어들었다면,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인지, 혹은 고독함을 가장하여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것인지 스스로 구분하고 알아차리는 연습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외로움을 넘어서 진정한 고독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독'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는 분도 있을 것이다. 외로움을 넘어서는 과정이 결코 쉽지 만은 않다. 그런 감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필자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애써 외면하거나, 이 과정이 너무 느리다고 조급해 하지 않고 전지적 시점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고독과 친구가 되는 여정은 누구에게나 다른 속도로 진행된다. 기존의 생각과 감성 관성을 멈추고 한 걸음씩 자신만의 고독을 찾아 나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