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없는 하루

by 느린 발걸음

그런 날이 있다. 하루가 빽빽하게 채워져 빈틈이 없는 날이.

일부러 그러려고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는 날.

하루의 중간에서는 잘 인지하지 못한다. 정신없이 이것저것 하느라 바쁘니까.

그런데 낌새는 있다. 피곤하고 지치고 멍한 기분이 살짝 살짝 스쳐간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기에 힘을 낸다.

자려고 누우면 그제야 피로가 급격하게 밀려온다.

누운 채로 꼼짝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든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빈틈 없는 하루를 보내면서 뿌듯해했을 거다.

하루를,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충만감이 나를 감쌌을 거다.

갓생을 살았다며, 이렇게 열심히 산 나를 대견해하며 칭찬했을 거다.

계속 이렇게 나가면 될 거라는 채찍질도 겸하면서.

그래서 하루 중 빈틈이 보이면 그 틈에 무엇이라도 채우려고 노력했다.

아마 그 시작은 내 인생을 내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결혼 전에 나는 직장인이었고, 직장 다닐 때는 내 일이라는 걸 했기에 이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일만으로도 벅찼고, 그래도 책을 읽고 자기계발을 가끔씩 하는 걸로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결혼 후 두 아들을 양육하고 집안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 삶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 생활만으로도 만족했다. 하지만 공허했다.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조금 달라져 보겠다고 마음먹고 책을 읽고 온라인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활력이라고는 없던 삶에 활력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았다.

욕심이 생겼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다가 번아웃이 자주 왔다. 그래도 나를 몰아붙였다.

커리어가 중단되었기에 뭐라도 붙잡아야 할 것만 같은 조급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몰아붙이다 힘들어서 한동안 모든 걸 놓았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면서 하루에 쉴 틈이 조금이라도 있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몰아붙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됐다. 될 수도 있지만 자주 지쳤다. 효율이 떨어졌다.

쉬는 틈이 있어야 머리도 몸도 이완되면서 생각도 정리되고 다른 생각도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하루에 조금이라도 틈을 내자고 다짐했었다. 한동안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성격이 문제였다. 뭐든 빨리빨리 해야 직성이 풀리는.

조금 천천히 해도 괜찮다는 의미로 닉네임도 '느린 발걸음'으로 지었건만.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데 나 혼자 나를 볶아대고 있었다.


며칠 전에 정말 빈틈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느꼈던 하루를 들여다보면, 일어나자마나자 밥을 했다.

먹을 반찬이 별로 없어서 오랜만에 반찬을 몇 개 하자고 다짐했다.

시금치 나물, 무나물, 멸치 볶음, 대파 볶음, 어묵탕, 카레를 아이들 학교 가기 전까지 했다.

아이들 초등학교 가는 길 배웅하면서 헬스장에 들러서 1시간 운동을 했다.

집에 와서 씻고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썼더니 점심 시간.

남편과 함께 점심 밥상을 차려서 밥을 먹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그러다보니 둘째 아들이 하교할 때가 다 되어서 데리러갔다 왔다. (초2면 이젠 혼자 와도 될 것 같은데...)

남편 일을 재택으로 도와주는 게 있어서 그것 좀 마무리해서 남편 출근할 때 주고.

책을 읽고 리뷰를 써야 하는 게 있어서 책을 읽었다.

첫째 아들 하교하고 오면 함께 운동을 하러 가기로 해서 밖에 나갔다.

하는 종목이 그때그때 다른데 그때는 농구 골대에 공 넣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과 1시간 정도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면 바로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아침에 반찬 해 놓은 것이 있지만 몇 가지 더 추가해서 상을 차려서 밥을 먹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아이들이 중간중간에 뭐 해달라는 게 있으면 해주고, 책 읽으면서 남편 일 추가로 하고.

강의를 들어야 하는 것도 있어서 듣고. 다이어리 정리하고.


하루를 들여다보는 데 쉴 틈이라곤 전혀 없었다는 걸 알았다.

숨을 헉헉대며 달려온 느낌. 남편은 가끔 그런 나를 보면 왜 그렇게 집에서 빨리 빨리 다니냐고 한다.

아마 하루에 이만큼 해야지 생각했으면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해서 그런가보다.

그런데 인생이 어떻게 계획대로만 될리가. 중간에 예상치 못한 일들이 끼어드는데 그것까지 다 하려니 빈틈이 없는 거다. 그러면 계획한 걸 조금 느슨하게 해도 될텐데 그러지 못하고 어떻게든 끼워넣는다.

그러니 그렇게 힘든거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 저녁 8시 30분부터 탈진했다.

이젠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쉽게 지친다.

어떻게든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을 만들어야지 생각하는데 그게 또 말처럼 쉽지 않다.

뭐라도 하려는 내가 보인다. 이젠 좀 쉬라고! 얘기해도 말을 지지리 듣지도 않는다.


빈틈 없는 하루를 갓생의 증거라 생각했던 나를 이제 좀 떠나보내고 싶다.

하루가 빈틈 없으면 내 머리도 뭔가로 가득 채워져서 바람도 통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의도적으로라도 베란다 창을 보면서 멍 때리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가득가득 채워넣기만 해서는 새로운 게 들어갈 자리가 전혀 없을 테니까,

이렇게 다짐하지만 또 잊어버리고 종종 거리며 다닐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젠 몸이 조금은 제어해준다. 나이 들었으니 적당히 하라고 신호를 준다.

그 신호를 무시하지 않으면 된다.

하루 사이사이 바람 좀 통하게 하면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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