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는 데도 출발했다. 구름속을 걷는 듯 안개에 휩싸인 서북능선을 걸었다. 안개는 미스트처럼 흩어지는 비가 되기도 했다. 잠깐 열린 하늘에 구름이 폭포처럼 설악 능선을 타고 쏟아지는, 꿈에도 잊지 못할 풍경을 만났다. 설악을 올라야만 볼 수 있으니 고됨을 달게 즐길 수 있다.
혼자였으면 가지 못했을 길, 5명의 산 벗과 떠난 1박 2일의 설악산 종주다. 10년 만에 설악을 넘겠다고 버스를 탔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속초(한계령) 버스에 탑승한 시간은 7시 반. 동서울터미널은 리모델링 중이라 어수선한 분위기다. 조금 일찍 만나 아침을 먹었다. 터미널 앞의 포장마차에서 김밥 한 줄과 설악산 산행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국수 한 그릇에 말아 후루룩 들이켰다. 산행 중에 먹을 김밥을 사서 각자의 배낭에 챙겨 넣었다.
버스 안은 금요일인데도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로 만석이다. 동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인제를 지나 한계령에 우리를 내려주고 흘림골, 오색을 들렀다 속초까지 간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한계령까지, 2시간 10분이 걸린다. 숫자로 보면 참 가까운 거리다.
강원도로 향하는 도로에서 본 하늘은 흐리긴 하지만 그래도 비는 오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는데, 웬걸! 설악산에 가까워 올 무렵부터 버스 앞 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버스에서 내리자 으스스 춥고, 안개가 자욱하다. 가랑비가 내린다. 심리적으로는 억수로 내리는 비 못지 않은 중압감이 느껴진다.
1박 2일을 설악산에서 보내려는 야심 찬 계획에 들떠있던 우리는 실망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버스 승객의 2/3이상이 내렸는데, 함께 내린 이들은 벌써 계단을 올라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궂은 날씨에 바로 출발하는 것에 의욕이 떨어진 상태, 막걸리 한 병으로 몸을 데우고 마음을 추스르기로 한다. 매점 식당에서 메밀전, 황태해장국을 시켰다. 황태해장국이 진하고 반찬으로 나온 콩나물무침이 아삭한 게 뜻밖에 맛집이다. 9시에 문을 연다고 하니, 새벽에 나오느라 아침밥을 못 먹었다면 이 식당을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비가 잦아진 듯해 한계령 입구에 올라섰다. 가파름이 심하다. 10년 전에는 새벽 3시에 출발하였고 그때는 어둠에 싸여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어 이렇게 계단이 높은지 몰랐다.
숲은 안개가 자욱해 신비로웠다. 신선들이 살만한 선경으로 들어가는 길이 이 길과 같을까? 설악산 종주는 분명히 고될 것이다. ‘이 힘든 여정에 끼어든 나! 스스로를 칭찬해야 할까, 무모하다 탓해야 할까?’ 이런 갈등은 산행 내내 이어졌다.
고산에서 피는 금강애기나리가 안개에 젖어 촉촉하다. 배낭을 메고 키가 작은 야생화 사진을 찍는 것은 허리에 부담이 크다. 산행 중이기 때문에 배낭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세를 낮춰 사진을 찍기 마련이다.
특히 키 작은 꽃을 만나면 더하다. 지천으로 핀 두루미꽃 앞에서 배낭을 맨 체 납작 바닥에 엎드린다고 생각해보라. 무거운 배낭을 등에 올려놓은 채로 꽃을 찍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나를 보니, '나 아직 산행 할만 하구나'
분홍색 철쭉이 지금 한창이다. 서북능선에서 가장 많이 본 꽃이 철쭉이다. 안개 속에서 연분홍 치마를 입은 다소곳한 자태의 여인에게 그마마 힘을 얻는다.
그다음으로 많이 본 꽃이 큰앵초, 철쭉이 치마였다면 큰앵초는 진한 꽃분홍 저고리다. 안개에 휩싸인 숲에 꽃분홍 저고리가 이곳 저곳 떨어져 있다.
안개는 전망을 감춰버린다. 시야가 훤히 보일법한 곳이라도 기대를 내려 놓아야 한다. 안개가 자욱하여 바위투성이 가파른 발밑만 보일 뿐 먼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간혹 하늘이 열릴 때에야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자각할 뿐, 앞으로 내딛는 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서북능선이 이런 데 내일 공룡능선을 넘을 수 있을까?’
안개 무리 사이에 나도옥잠화가 보인다. 안개속 분위기에 취해 오래 머물법도 한데 시간이 없어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고됨을 덜어주는 나도옥잠화에 고됨이 사르르 녹는 듯하다.
희운각대피소 산장을 예약하였기에 중청대피소가 보이는 곳에서 소청봉으로 방향을 튼다. 바위투성이 길에 경사도가 큰 하행 길에 다리에 무리가 간다. 특히 소청봉 즈음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 내려가는 구간이 엄청난 난코스다. 다리가 무거워 끌고가는 것 같은데 오늘 잠을 청할 희운각대피소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마음은 바쁘고 바쁘나 설악 공룡능선으로 쏟아져 내리는 구름폭포에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구름이 이처럼 강을 이루고 폭포가 되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다. 안개와 비가 만들어낸 신비로움이다. 공룡능선을 넘나드는 운해와 구름폭포에 지금까지의 힘듦이 말끔히 사라진다.
마주 오는 청년은 공룡능선을 넘었단다. 산행하는 7시간 내내 비가 왔다니 그나마 안개비였던 서북능선 산행은 거의 축복에 가깝지 않은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희운각대피소 소등시간이 저녁 9시다. 최소한 7시쯤에는 도착해야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지친 걸음으로 대피소에 도착해 신분증을 제출해서 방(?)을 배정받았다. 10년 전에 비해 완전 최신식으로 바뀌었다. 나무로 되어 있는 방은 복도와 양옆의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이곳 깊은 산중에 수세식 화장실이라니? 하지만 휴지는 없으니 자기가 가져온 것을 챙겨가도록.
대피소 매점이 저녁 8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그전에 필요한 물품을 사 두어야 한다. 내일 필요한 물을 샀다. 500mL 한 병에 1,500원이고 햇반은 3,000원이다.
거의 8시가 다 된 시간이지만 다행히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먹어야 힘이 날 터, 삼겹살을 지글지글 구웠다. 일행이 집에서 키운 상추를 씻어왔고 여기에 삼겹살을 싸서 먹었다. ‘게 눈 감춘다’라는 말이 무슨 일인지 알았다. 너무 맛있어서 말을 잃었다. 아니 말할 시간이 없었다. 고기를 다 먹고 난 후 남은 김치에 밥을 볶아 먹었다. 최고의 진수성찬이다.
식사 후 계곡물을 끌어온 호스가 있어 기름기가 묻은 손을 씻었다. 이 물로 양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식수로 부적합하다는 안내 문구가 있으니 먹지는 말도록.
이제 방으로 들어가 잘 시간이다. 완전 오픈된 공간이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린다. 이렇게 다양한 코골이 소리라니. 한참을 뒤척였다. 내일 새벽 4시에 출발해야 한다. 양을 몇 마리를 세었는지, 제발 잠 좀 들어라! 귀마개를 가져올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