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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인식개선] 청각장애인 최일권화백

운보김기창의 제자 한국화의 맥을 이어간다.

최일권 화백 사진=최봉혁기자 


지난 15일 ~17일 까지 삼성동 코엑스몰에서 개최된 "한국화의 맥을 잇다" 청각장애인 운보김기창 화백의 제자인 최일권 화백이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대한민국 장애인문화예술대상 수상자 최일권 화가와 그의 아내 홍영란 부부를 통해본 한국 장애예술인에 대한 현실이야기 이다.


그의 아내 홍영란 씨의 도움으로 '한국화 맥을 잇는'  화가로서의 지나온 여정을 정리했다.


최화백 과의 대화는  필담 외에도 그의 표정, 손짓 그리고 30년 가까이 그의 목소리가 되어 준 아내가  항상 그림자처럼 함께한 사랑의 힘이 늘 존재했다.


최화백은  3남매 중 둘째로 서울 중구 필동에서 출생해 마포에서 성장한 서울토박이다. 


그의 부모는 청각장애인인 최일권 씨가 정규교육을 마칠 수 있도록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선희학교(서울농학교의 전신)에 통학하는 것을 도왔다. 


일반적으로 그시절에 장애인에대한 부모의 교육열과 사회적분위기가 장애인을 비하했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부모의 교육열은 진보적이고 헌신적인 분들이었다.


체신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집 안에만 있지 않고 사회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최화백 에게는 행운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탓에 다른 장애아동이 누리기 힘든 문화적 혜택을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으로 다양한 경험을 향유 했다  수영, 축구, 등산, 스케이트 등 스포츠는 물론 여행도 자주 했다. 


어릴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이 특기였던 최작가는 학교 대표로 사생대회에 출전해 많은 상을 받았다. 


그의 재주를 일찍부터 발견한 어머니는 미술공부에 대한 환경조성과 지원을 했다

그렇게 자라나던 최화백 를 심원 조중현 선생(이화여대 미술대학장 역임)에게 소개한 사람은 현재 고인이 된 운보 김기창 화백이다. 


처음에는 어머니 친구 분을 통해 운보 선생을 알게 돼 그에게 그림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운보 선생은 장애인이 장애인에게 배우면 좁은 세상만 보게 된다며 먼저 심원 선생에게 배울 것을 권했다. 


심원 조중현 선생(1917~1982)은 주로 새, 짐승, 물고기, 꽃 등을 소재로 수묵화와 세필 채색화를 즐겨 그리던 화가다. 그의 영향으로 최 화가는 ‘화조’를 많이 그리게 되었다. 

최일권 화백의 작품 동영상

춘음 화색지


주변에서 쉽게 보는 꽃과 새 그리고 나무와 야생동물, 가축 등이 그림 소재다. 

자연의 색을 그대로 표현하려 애쓰며 섬세하나 과장되지 않게 자연을 화폭에 담아내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주는 게 특징이다. 


지금은 점과 선을 이용해 한국적인 소재를 현대적 기법으로 좀 더 단순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심원 선생을 통해 그림의 기초를 배운 최 화가는 이후 운보 선생 밑에서 다시 그림수업을 받게 된다. 


운보 선생을 통해 ‘장애인이지만 장애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희망을 배웠다. 


스승인 운보 김기창화백 과 함께 최일권화가 ,홍영란 여사 더불어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돕는 사회활동의 길을 개척했다. 


운보 선생은 그가 후배 청각장애작가들을 위해 한국농미회를 만들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건청인들(비장애인)’과 겨뤄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포부를 심어 주었다. 

그는 자신을 장애인으로 가두지 않고 일반인과 교류를 통해 장애인 미술의 한계를 넘기 위해 노력했다.


코엑스몰에서 열린 최일권화백 개인전=사진 최봉혁칼럼니스트 

다양성 인정해야 개성 발휘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찾는 관람객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다. 

최 화백은 그들이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 ‘쓸모 있다’는 긍정적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한국 후소회, 농미회, 한국장애인미술협회, 한국장애인미술대전 등 다양한 모임의 회원인 동시에 전시작품 출품과 추천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장애를 불만요소로 삼는 것은 금물

“장애를 불만요소로 삼는 사람은 사회에서 수용하기 어렵다. 작은 일도 감사할 줄 알 때 비로소 비장애인들과 교류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자신에겐 엄격한 기준을 설정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최화백은후배들에게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누군가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의 생활 신조는 ‘이웃과 함께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자. 나눌 힘이 있을 때 나누며 살자. 가족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그는 특히 가족을 위해 신경을 많이 쓰는데 외아들 준영이가 세상의 다른 아버지들처럼 해주지는 못했지만 어느새 건실한 청년으로 자라나 준 것이 고맙다고 한다.


어느 때보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최일권 화가는 개인적인 작품 활동 외에도 장애아동들을 지도하는 일도 열심히 한다. 그들의 미술적인 끼를 발굴해 주고 싶어서다. 


그에게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데 죽기 전에 창고에 쌓인 작품들을 전시할 개인 갤러리나 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그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타인을 위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지금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급하다.


[직장내 장애인 인식개선 전문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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